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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Nov 25. 2021

떠나는 모습까지 아름다운,
소국

떠나는 가을을 바라보며

말 못 할 슬픔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이 식물로 다시 태어난다는데


또다시 아프게 죽은 식물은 무엇으로 태어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김정진, "식물인간" 중  <문학동네, 2016>



이 시를 읽고 몇 초간 멍하니 있었다.

수십 년 간 꽃을 대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의 실체를 드디어 완성한 느낌이었다.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무언가 부족했던 빈자리를 채운 것 같았다.  꽃을 볼 때면 영롱한 햇살을 튕기는 고고함보다 그들의 마른 눈물 자국을 느끼곤 했다.


왜 있지 않나.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왠지 말을 걸어 위로하고 싶은 여자,  멋있기만 한 게 아니라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싶어지는 남자. 그런 느낌을 꽃을 보며 받곤 했다. 그동안 느꼈던 막연한 감정의 기원을 알게 되어 문제가 해결된 듯 후련했다.


시간이 갈수록 슬픔이 참 귀한 감정이란 생각이 든다. 끄떡하면 잘 우는 나이지만 예전과 달리 그 눈물이 온전한 슬픔에서 나온 거라고 보지 않는다.  두 뺨을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 이외에도 분노, 억울함, 후회 등이 뒤섞여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 상황에 대한 원망, 과거에 대한 후회와 질책, 이런 복합적인 감정 귀퉁이에 웅크린 슬픔 한 조각을 담았다고 그 눈물을 슬픔으로 보긴 어렵다.  10퍼센트 과일 함유 음료를 과일 주스라 부르기 민망한 것처럼 눈물 자체를 슬픔이라 할 수는 없다.  슬픔 함유 눈물이라고나 할까. 


하다못해 내 몸 어느 한 구석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듣고 눈물이 핑 돌아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나 누구보다 건강관리에 치밀했는데?'라는 분노가 먼저 일어섰다.

그 뒤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슬퍼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약이 필요했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50대에 세상을 떠난 지인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며,

내게 밀려든 감정은  현실을 부정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심장마비? 오십에? 아니 건강했는데? 아니 왜?'

내 지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묻고 또 묻곤 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신발을 벗으면서야 비로소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격양된 표정으로 고인 가족의 감정을 부풀이거나 휘저어선 안됐다.

반면에 인정할 만한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의 부고에는 가라앉는 슬픔을 느낀다. 세상과의 인연을 순탄하게 정리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날만큼은 떠나는 이를 향해 온종일 평안을 기원하게 된다.


분노, 원망, 후회대답해야 할 질문이 남은 미결된 감정인 반면 슬픔완결감정이다.  상황을 받아들인 뒤에야 오롯이 슬픈 감정은 찾아온다. 슬픔은 겉으로 날 세워 튀지 않고 안으로 깊게 흐른다.  왜?라고 묻는 일도 없다.  그 상황 속으로 스며들어 흐느낀다.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파동이 퍼지듯 번질 뿐이다.



슬픔은 순응적이고 순하다


저 아름다운 꽃의 전형이 슬픔이었다니. 평소에 슬픔을 귀하다고 찬양하던 내 생각의 입구를 찾은 것 같다. 어렴풋한 감정이 실체를 드러내자 활기를 얻는다. 어쩌면 아름다움의 전형은 슬픔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가 더욱 반가운 것은 '이쯤에서 나도 혹시? 식물로?' 하는 은밀한 기대를 품을 수 있어서이다.  누가 볼세라 주머니에 꾸욱 찔러 넣었던 말 못 할 슬픔을 뒤적거려 본다.  주머니 속 손끝에 닿은 물컹한 슬픔이 당첨번호가 찍힌 복권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손을 주머니 안 쪽에 찔러 넣고 축축한 슬픔을 만지작거린다. 혹여나 터질까 봐 조심하면서.  


그나저나 '나 무슨 꽃으로 피어날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국


 어렸을 때 집 마당에 목련나무가 있었다. 목련나무에 목련이 피면 마당이 형광등을 켜 놓은  듯 환해졌다. 어느 날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갑자기 어둑한 기운에 두리번거렸다. 내 눈에 들어온 목련은 며칠 전 본 목련이 아니었다. 하얗던 꽃잎이 며칠간 방치된 바나나 껍질처럼 검게 썩어갔다.  그 탐스러웠던 목련이 지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돌리며 '난 지는 모습이 예쁜 꽃이 좋아"라고 외치곤 했다.


그 이후 꽃을 볼 때, 지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소국은 질 때, 색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여위어갈 뿐  대체로 피었을 때 모습 그대로이다. 마치 여름내 휴가로 바닷가에 다녀온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 친구의 모습은 휴가 가기 전보다 그을리고 야위어  버석거리는 느낌일 뿐, 낯설지는 않다.


지면서도 아름다움을 잘 유지하는 소국처럼, 나이가 들면서도 아름다운 중년에 눈길이 간다.  젊어서 예쁜 모습은 타고난 것인데 반해 중년의 아름다움은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주름을 거부하고 흰머리를 꺼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나이에도 미래에 대한 을 간직하고 있기에 눈빛이 살아있고,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잘 소화했기에 표정온화하면서도 생기 있는 중년, 그런 중년의 아름다움은 결과물일 뿐이 아닌 과정을 담고 있어 더 가치 있다.  오래 꽃 피우고, 질 때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꽃, 소국처럼.


비록 젊었을 때, 화려하기는 장미나 목련보다 못하고 세상을 밝게 밝혀 주목받는 데엔 벚꽃보다 부족하지만 소국은 내게 아름다움의 '지속성'측면에서 볼 때, 가장 완성도 높은 꽃이다. 지금까지는 끝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뿐이었다면, 앞으로는 하나 더,  말 못 한 슬픔이 많아서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을 전해주려고 오랫동안 피어있는 꽃으로 느끼게 된다. 할 말이 많이 남은 꽃.


이 시 덕분에  올해 국화를 주문하면서 주문 메모란에 "봉우리로 보내주세요"라고 썼다. 예년에는 꽃 구입 시 활짝 핀 꽃을 사 오곤 했는데 이번엔 봉우리부터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다.


                            (10월 15일 택배로 받아 10월 19일 활짝 핀 소국)


                                                                   

이번에 그들의 말 못 한 사연을 들어주리란 각오로 비장했다. 봉우리로 온 꽃이  마음을 열듯, 입을 조심스레 열길 기대하며 들여다봤다. 물론 호기심에 가득 차 캐묻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 못 하는 억누름의 압력이 줄어들길 바라며 바람을 맞게 하고, 그 답답함이 풀어지길 바라며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건네고, 그 눅눅함이 해소되길 원하며 햇살 가득한 창에 내어줬다.


신기한 건 잘 들으려고 하니 어느새 들린다는 것. 국화의 소리가? 아니 내 마음의 소리가. 

어떤 대상의 슬픔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내 슬픔을 쓰다듬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11월 20일, 한 달여 뒤에도  아름다움을 잘 유지 중인 소국)


이제 며칠 뒤면 국화가 떠날 듯하다 (가까이서 보면 시름시름하다).

할 말은 다 했는지 아침이면 창가로 옮겨 눈을 맞춰본다.

시간을 곱게 관통한 국화를 눈에 담으며 '나도 저렇게 세월을 흐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11월 25일, 집에 온 지 6주가 지나 많이 시들었지만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소국>


     대문 사진은  <pixabay  beintous님 사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글을 잊지 않고 읽어주시는 구독자님과 작가님들^^

요즘 제가 글이 좀 뜸하죠. 사실은 제가 어깨가 안 좋아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지난달까지 다니던 병원을 옮겨 요즘엔 좀 멀리 다니는 관계로, 일상에 좀 차질이 있습니다. 

여러 상황으로 부득이하게 댓글창은 당분간 닫아놓게 되었습니다. 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날씨가 많이 싸늘하네요. 구독자님과 작가님들 마음만은 포근한 날로 이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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