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에 한 이별

from 1997.4.1 to 2008.4.1

by 글쓰는자
특별한 날에는
별난 일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의미 없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장난처럼
거짓말처럼
별일 없이 하루를 넘기고
그제야 말해야 했다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

매년 이유 없이 찾아오는 날짜와 함께
철없던 시절
별 뜻 없던 헤어짐이 돌아온다


나의 첫 만우절은 1997년 4월 1일이었다.

당시 순진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만우절이란 것을 몰랐다. 여느 때와 같이 등교를 했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왠지 우중충한 날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날씨가 그랬던 것인지 단지 내 기억이 그랬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조례 시간이 되었고, 교실의 앞 문으로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상당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얼굴, 부리부리한 눈빛을 가진 남자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에 대한 내 첫인상은 1997년 3월 2일 일기장에 간단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불독을 닮은 담임 선생님이 생겼다.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무섭다.'


담임과 반 학생들의 관계는 사실 별로 좋지 않다. 학교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 아무래도 늘 부딪혀야 하는 관계다 보니 괜히 친구네 담임 선생님이 더 좋아 보이는 게 학생의 마음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담탱이의 잔소리가 결국은 우리를 위한 거였더라' 회상할 뿐이다.

철없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엔 더더욱 그렇다. 집에서는 엄마, 학교에서는 담임이 나를 귀찮게 할 뿐이다.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런 담임이 무섭고 엄격하게 생겼다면 어린 학생들은 더 거리감을 느낀다. 게다가 남자 선생님이라면...


하지만 1997년의 나의 담임 선생님을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다. 친절하고 섬세했으며, 똑똑하고 재밌는 분이었다. 매 순간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했고, 아직은 어렸던 우리들도 그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그 선생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형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우절이 되었다.


그날따라 분위기를 잡으며 교실로 들어온 담임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은 한번 훑어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 "선생님이 오늘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다시 침묵.

아마도 그 교실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근'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한 둘, 학생들이 전근이란 말이 가진 의미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우리를 떠난다!'

학생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어떤 학생은 대성통곡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가지 마세요 선생님", "가면 안돼요 선생님", "싫어요!" 아마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선생님은 뿌듯했을 것 같다. 속으로 웃고 계셨을 선생님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힘 없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후로 한참 동안이나 우리들은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하나 둘 지쳐 갈 때쯤 옆반 선생님이 앞문을 빼꼼 열고 말했다.

"오늘 만우절이야 얘들아"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그 말을 들었지만 또한 듣지 않았다. 아무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만우절'이라는 말의 뜻을 몰랐다. 그저 정들기 시작한 담임 선생님이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자신들의 장난이 성공한 것에 기뻐하며 우리에게 만우절임을 알려주려던 옆반 선생님은 진정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되려 당황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학생들을 지켜보다 우리반 담임 선생님을 데려왔다. 불과 10여분밖에 되지 않았을 시간일 텐데 우리는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누군가는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서럽게 울었다. 그제야 만우절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실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담임 선생님은 만우절이 무엇인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설명해주었다. 선생님은 매년 만우절마다 학생들에게 장난을 치는데 고학년 학생들은 짐을 싸서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믿는다는 얘기를 하며 멋쩍은 웃음도 보였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우느라 수고한 우리를 한 명 한 명 안아주었다.

그 후로 매년 만우절만 돌아오면 선생님들을 상대로 온갖 장난을 쳤다. 옆반과 교실을 바꿔 앉아 있기도 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강당으로 모여가 있기도 하고, 책상을 거꾸로 돌려 앉아 뒤통수로 선생님을 맞이하기도 했다.(이런 장난이 매번 수학 시간이었던 것을 우연일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교실 밖 창문 아래에 널브러져 있기, 전 학년이 시간 맞춰 동시에 뛰쳐나가기 등 꽤 스케일이 큰 장난으로 발전했다. 항상 알고도 속아주는 선생님들과,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어 만우절만 되면 겹겹이 쌓여가는 추억들이 풍성해졌다.


2008년 4월 1일.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철부지 학생이 아니었고, 만우절 장난은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굳이 만우절이 아니어도 거짓말이 필요한 날이 차고 넘치니 만우절을 챙길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학한 선배들이 시시한 장난을 걸어오긴 했지만, 예전의 선생님들처럼 알고도 속아줄 여유가 없었다. 함께 수업을 듣던 동기들 대부분이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나는 진짜 공학도가 되기 위해 실험실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고, 대학생활 첫 연애는 지는 중이었다.


헤어져야겠다고 고민한 시간이 꽤 길었는데, 하필 나는 만우절에 이별통보를 해버렸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통보였다. 어렸을 때의 나는 연애하면서 감정이나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아마도 상대방은 내가 이별을 오래 고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뜬금없이 내뱉은 헤어지자는 말에 그냥 만우절 장난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인지 쿨하게 '그래' 하고 끝났다. 생각보다 쉬운 이별에 나는 끝까지 덤덤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 학교에서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는 걸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의 이별이 전달되지 않았구나'

나의 이별통보는 상대방에게는 그저 시시한 만우절 장난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다시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 했고, 그제야 진짜 이별이 전달되었다. 그 학기 유기화학 수업시간은 지정석에 앉아야 했다. 우리의 자리는 뒤에서 두 번째 줄에 나란히 있었다. 한동안 그 친구는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느 날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나타나 옆자리에서 검은 아우라를 뿜어대며 학기를 마무리했다.


비겁한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의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너무 빠져 있었고, 만우절 인지도 모르고 이별 통보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 매너 없는 이별을 한 것이고, 상대방에게는 지우지 못할 상처를 준 나쁜 X이었다. 우리는 두 번의 이별을 했고, 그때 이후로 나는 만우절을 잊고 지냈다. 훗날 군대에 있는 그 친구에 장문의 편지를 써서 사과를 했고, 지금은 좋은 친구관계로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미안한 마음이 만우절만 되면 다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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