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우리 집을 찾아올 수 있도록 그림 지도를 글로 써보세요.
주소가 없던 옛날, 인도에서는 그림이나 긴 설명으로 자신의 집 위치를 설명했다고. <시와 산책>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내 집을 주소 없이 설명하는 글을 쓰면 눈 감고도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 새삼스럽고 다정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종로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 계곡 종점에서 내리면 정면에 인왕산 바위가 보일 거야. 그 잘생긴 바위를 보고 왠지 익숙한 동양화가 떠오른다면, 넌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이나 국사시간에 꽤 공부 좀 했던 교양인일 거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겹친 거거든.
비 오면 더 멋진 그 인왕산의 검고 늠름한 바위를 보고 서 있으면 왼쪽에 편의점이 있어. 그 편의점 바로 옆에 동네 할머니들은 한 번씩 오르다 숨 고르며 쉬어가는 만만찮은 오르막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올라와. 그럼 또 잠깐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데 딱 다섯 발자국만 내려 걸어오면 왼쪽 편에 고추랑 토마토, 상추와 맨드라미 꽃을 정성스럽게 길러놓은 화분들이 보일 거야. 이걸 키우는 할머니는 엄청 부지런하신가 봐. 아마 자식들도 다 정성으로 잘 키우셨을 거야. 그 반짝거리는 귀여운 식물들을 구경하면서 더 들어오다면 오른편에 왜 이런 서민 동네에 이런 집이 있지 싶은 하얀 돌벽이 아주 높은 고급 저택이 나와. 성북동이나 평창동에나 있을 법한 저택을 공영주차장으로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빌라. 그 빌라 중에서도 큰 느티나무로 창문이 거의 가려져 집 안이 보이지 않는 2층 집이 우리 집이야.
나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자주 그 저택 집을 구경해. 빨래 돌리러 갈 때나 쓰레기 정리할 때마다 베란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그 저택을 구경하곤 해. 내 나이 36이지만 난 내가 아직도 작은 아씨들의 '조' 같아. 그래서 꼭 저 저택에 로렌스 할아버지랑 로리가 살 것만 같아. 크리스마스엔 저녁 파티에 초대받아 입고 갈 옷을 고민해야 할 것 같고.
이 집을 5년 전에 고를 때 우리 엄마가 그랬어. 현실이 넉넉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 보고 살라고 했어. 대체 좋은 게 뭐냐고 하니까 "뭐긴 뭐겠냐 부잣집이지"라고 하셨지. 웃어넘겼지만 살다 보니 진짜 맞는 말 같아. 나는 여기 작은 빌라에서 복닥거리다가도 저 저택을 보면 나 사는 곳은 잊고 공상만으로도 풍족하고 행복해. 요새 집을 볼 때 발 딛는 공간보다 보이는 뷰를 따지게 되는데 그래서 인가 봐.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져.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부자 뷰 즐기면서 커피나 하자고. 똑같은 커피라도 부자 뷰 보면서 마시는 커피는 다르긴 다르다?
+ 나는 즐기지만 저 저택 사는 부자는 못 누리는 부자 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