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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닉샘 Nick Sam Feb 07. 2019

아이들은 경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닉샘의 일상노트 - 가을 운동회

1. 만국기 아래 서서


약 20년 만일까. 파란 하늘에 걸린 만국기를 보며 운동장에 섰다.


아버지회 활동으로 아이 초등학교의 운동회 진행을 돕기 위해서다. 가을 운동회의 분위기와 모습은 어릴 적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년과 반 별로 모여 앉은 아이들을 보니 어릴 적 느꼈던 약간의 긴장과 설렘, 들뜨고 신나는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운동회의 기획과 진행을 선생님이 아닌 이벤트 회사의 직원들이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이벤트 회사 사람들이 운동장 바닥에 선을 긋고 소품들을 준비한 모양이다. 운동회가 시작되고 체조부터 운동 경기까지 대부분이 이벤트 회사 사람들이 진행했다. 덕분에 아버지회의 아빠들이 할 일은 간단했다. 그중 가장 비중 있는 역할은 달리기 결승선에서의 일이었다.


아버지 몇 명이서 달리기 트랙의 끝에 섰다. 손에는 각각 1등, 2등, 3등 도장을 들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달리기 트랙 중간에는 거대한 풍선 구조물(?)로 만든 장애물이 있었다. 아이들은 물렁한 풍선 구조물의 구멍을 통과해 결승선까지 달려야 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약 30개의 반 아이들의 달리기는 운동회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되었다.


2. 아이들 손등에 도장을 찍으며


나는 3등 도장을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보통 3~4명이 한 조로 뛰었기에 3등은 사실 꼴찌나 다름없었다. 4명이 뛰면 3등과 4등 아이 둘에게 모두 3등의 도장을 찍어주기로 했다. 달리기 트랙 반대편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니 아이들의 떨리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3등 도장을 든 나는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어렸을 적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던 나는 꼴찌 아이들의 마음이 더욱 신경 쓰였다.


출발을 알리는 공포탄 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들어왔다. 결승선까지 달려온 아이들은 가쁜 숨을 쉬며 우왕좌왕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잘 챙겨 도장을 찍어줘야 했다. 3, 4등 아이 둘의 손을 붙들고 손등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런데 아이들의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도장'에 대한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축에게 찍는 등급 판정 도장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오르는 이미지들... 과거에 노예들에게 찍었다는 낙인, 계급과 차별...


아차, 아이들의 즐거운 행사인데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지.


마음을 다잡고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며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주려 노력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아이들의 마음을 챙겨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지만 계속되는 문제의식과 슬픈 감정은 지울 수가 없었다. 1학년의 달리기가 끝나고 잠시 쉬며 다른 아버지들과 손등 도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다고 했다.


다음 학년들의 달기기가 진행되면서 등수 매기기가 아이들에게 주는 마음의 상처는 점점 더 분명해 보였다.


달리기 실력의 개인 차이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커졌다. 장애물 때문인지 중간에 넘어지는 아이들도 많았다. 꼴찌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도장 찍기를 거부하고 손을 뿌리치는 아이, 아예 뛰기를 거부하고 걸어서 들어오는 아이... 아이들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달리기는 계속 진행되어야 했다. 아이들은 쉼 없이 밀려들어왔다. 체계적이고 빠르게 돌아가는 진행 속에서 꼴찌 아이들에게 마음을 쓸 여유는 없었다. 이래저래 괴롭고 씁쓸한 마음이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3.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


진행의 분위기를 바꾸는 사례가 생겼다.


아마도 4학년이었다. 어떤 반에서 달리기에 등수를 매기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등수 도장을 들고 결승선에 섰다가 기분 좋게 진행 부스로 돌아와 앉았다. 잠시 쉬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절차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선생님과 아이들. 경쟁이 전부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았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아이들. 그들이 사랑스러웠고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그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도장을 찍고 있었을까.


곧 시작되는 다음 반의 달리기에서는 여전히 등수 매기기가 계속되었다. 아이들에게서 발견한 작은 희망(?)으로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꼴찌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어느덧 6학년 달리기가 마지막으로 진행되었다. 여자 아이 넷이 달리고 있었다. 장애물을 통과할 때쯤 등수는 분명해졌다. 1등으로 달리던 아이는 결승전 근처로 다가왔다. 한 아이는 장애물 근처에서 넘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어!


갑자기 달리던 아이들이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결승선 바로 앞에 있던 아이까지 모두가 동시에 넘어진 아이에게 달려갔다. 모든 장면들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달려간 아이들은 넘어진 친구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일어서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넷이 손을 잡고는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결승선까지 조용히 걸어 들어오는 아이들.


'그깟 달리기가 무엇이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찰나의 시간, 도장을 들고 서있던 아버지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주고 받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임을 확신했다. 1등 도장을 든 아버지가 4명 아이들 모두의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달리기, 등수 매기기, 도장 찍기, 경쟁과 보상, 불합리함,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 부끄러움... 그 순간 아이들은 내 머릿속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려 버렸다. 그들의 행동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불합리에 대한 저항, 용기 있는 결단, 혹은 합의에 따른 행동, 그런 것들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4.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방향을 바꾸어 뒤로 달리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어른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고민하고 판단하려고 할 때, 그러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런 순간에도 그 아이들은 이미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마음으로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 그것을 위해 행동했다. 친구, 우정, 사랑...?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것을 어른인 내가 짐작하여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아이들의 그 마음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다시 운동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매 학년 달리기가 끝나면 아버지들은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6학년 달리기가 끝난 후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그냥 조용히 휴식을 취했던 것 같다. 모두를 1등으로 만들어준 그 아이들의 달리기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제 등수가 새겨진 도장 찍기는 싫다. 굳이 찍고 싶다면 모두가 웃고 있는 '참! 잘했어요' 정도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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