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읽는다는 것은...
'절창'은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를 의미한다. 그리고 책표지를 보면 가느다란 틈 사이로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뿐이 아니라 활자화되어 있는 것을 읽는다. 때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읽음을 모두 다 이해하면서 읽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 이해했다는 정답은 과연 있는 것일까. 그저 읽고 내 나름대로 해석한다.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읽는데서 시작한다. 그 문제의 의미를 잘 읽고 이해해야지만 정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정답이 없는 것들을 읽고 해석하는 데는 지극히 내 주관이 개입하기에 어찌 보면 모든 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이 책의 소개글에 나온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군가의 깊은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의 소녀가 있었다. 우연히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사업가 문오언(烏焉).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주고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숨긴다. 차갑고 타인들에게는 잔인한 그이지만 그녀에게 보여준 호의만큼은 진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세상과 고립되었기에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집에 가득한 책을 읽는 것이었고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선생님을 구하게 되어 이 이야기의 화자인 선생님이 등장한다. 선생님이 누군가에게 이 모든 사실들을 진술(?) 하는 듯한 시점과 아가씨라로 호칭되는 그녀의 고백을 들어주는 선생님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나열된다. 여기서도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읽힘이 보인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과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 과연 그 행위에 진심의 가운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피가 나는 상처를 만지면 누군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그 능력을 사용하는 조폭 같은 사업가가 있고 , 폐쇄된 공간에 종사하는 실장(?)들이 있고, 그것을 파헤치려는 제삼자인 선생님이 있고.. 무슨 스릴러 영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상대방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오만함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도 그것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며 이해와 오해의 줄다리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문오언을 제외하면 오언이라는 이름도 한자로 보면 그 글자가 그 글자 같아 오역할 수 있는 이름들이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이름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우리이기에 말이다. 왜 다시 첫 장을 펼치게 되는지 알 것 같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천천히 꾹꾹 누르며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무언가를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물며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p. 14)'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p. 63)'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 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 p. 302)'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p. 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