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뱅쇼입니다.
설날에 시댁에서 밥을 먹으며 모주를 한 잔 마셨다. 모주가 뭔 지 잘 모르고 그냥 막걸리 같은 술이라 생각하고 한 잔만 마셨다. 너무 달고 시원하고 맛있어서 한 잔 더 먹고 싶었는데 점심 먹고 친정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술기운이 오를까 봐 딱 한 잔만 마셨다. 나는 한 때에 한 술 하였지만, 지금은 자의 반 타의 반 알쓰에 가까운 주량이 되어서 아쉽지만 참을 만하였다. 술을 거의 끊은 상태로 1년 정도 있었던 터라 모주 한 잔에 술기운이 올라올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흠. 나의 주량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군. 이때는 모주가 막걸리를 한약재와 함께 팔팔 끓여 알코올이 거의 없는 술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막걸리의 사촌쯤 되는 술 인 줄로만.
너무 맛있게 먹은 한 잔이 계속 생각이 나 근처에서 사 먹으려고 하니 사 먹을 데가 마땅하지 않았다. 편의점, 마트 어디에서도 모주를 팔 지 않는 것 같았고 전주 한옥마을 기프트샵에서 파는 것만 검색이 되었다. 온라인으로는 구매가 가능 하지만 연휴가 지나고 올 것이고, 한 번에 대량 구매 해야 하니 그것도 마땅치가 않으니 거의 포기 포기상태였는데 쿠팡에서 내 눈에 들어온 상품 하나, 모주 만들기 키트.
뭣이? 키트? 집에서 만들어?
그 키트에는 생강, 계피, 대추, 갈근, 감초 등의 한약재와 말린 배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고 막걸리 두 병을 준비해 같이 끌이다가 기호에 맞추어 설탕이나 꿀을 넣으라고 되어 있었다. 따뜻하게, 시원하게 모두 음용이 가능하고 감기와 피로 해소에 좋은 약술이라고 하였다. 아니, 이거 어디서 많이 봤다 하는데 코리안 뱅쇼 아니야? 코리안 라이스 와인 뱅쇼!
집에는 키트만큼 완벽한 구성은 아니지만 대강의 재료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담아준 생강청에 계피스틱과 대추가 들어있었고 청귤청도 있다. 뱅쇼를 끓일 때에 오렌지나 레몬 껍질 같은 걸 넣는 걸 본 적이 있다. 청귤청도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남편에게 편의점 좀 다녀오라고 부탁을 (심부름을) 했다. (시켰다). 들고 온 것은 장수 막걸리 두 병. OK!
막걸리 두 병에 생강청에서 건진 생강, 계피, 대추를 넣었고, 베이킹 소다로 박박 씻은 레드향 껍질과 청귤청의 청귤도 건져서 넣었다. 센 불로 팔팔 끓여야 알코올이 잘 날아간다고 하고 약불로 오래 끓여야 한약재의 성분들이 잘 우러난다고 한다. 대충 팔팔 끓이다가 약불로 줄였다. 색깔이 지난번에 먹었던 것보다 너무 하얘 보여 흑설탕을 한 스푼 넣으니 먹었던 그 색깔과 비슷해졌다. 따뜻할 때 머그잔에 한 잔 따라 마셔보았다. 분명 술인데 알코올은 거의 없고 달콤한 맛이 나고 시트러스계열의 상큼한 향에 생강 계피의 건강한 향도 살짝 올라온다. 맛 괜찮음!
오늘같이 강력한 한파가 몰려온 날, 베란다에 모주 냄비를 내어 놓고 식히니 금방 식는다. 깔때기에 걸러서 아까 막걸리 병을 헹구어 담는데 분명 막걸리 두 병으로 시작했는데 막걸리 병 한 개밖에 안 나온다. 내가 야금야금 맛보며 먹기도 하였지만, 재료들이 술을 꽤 많이 먹고 팅팅 불어 취한 듯 뭉그러져있다. 아, 예전에 자주 보던 술 취한 내 모습인 듯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은 치킨으로 정했다. 치킨에 아까 만든 홈메이드 모주를 곁들여 보기로,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엔 막걸리 잔이 없어 와인잔을 꺼냈다. 아이들도 함께 짠을 하기로 하고 잔을 네 개 꺼낸다. 어른과 똑같은 그릇에, 잔에 음식을 담아 주면 애들은 좋아한다. 유리며 도자기 식기가 아이들 손에 들어가면 깨질까 걱정하지만, 정작 그릇을 제일 많이 깨는 자는 바로 나다. 이건 정말 깨지는 잔이니까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고 하니 바로 전까지 칼싸움을 하던 형제가 우아하게 앉아 사과 주스와 요구르트를 홀짝인다. Manners makes Man. 언제 사람 되나 하는 아들들인데 와인잔을 들려주니 사람이 되었다. 잠시동안.
모주는 막걸리에 생강, 대추, 계피, 배 등을 넣고 하루 동안 끓인 술이다. 모주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어머니가 귀양지 제주에서 빚었던 술이라 해서 ‘대비모주(大妃母酒)'라 부르다가 ‘모주’라 줄여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어느 고을에 술 많이 마시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어머니가 막걸리에다 각종 한약재를 넣고 달여 아들에게 주어 ‘모주’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다. 모주의 사전적인 뜻은 밑술 또는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라는 뜻인데, 전주지방의 모주는 막걸리에 생강, 대추, 감초, 인삼, 칡(갈근) 등의 8가지 한약재를 넣고 술의 양이 절반 정도로 줄고 알코올 성분이 거의 없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계핏가루를 넣어 먹는다. 전주 지방의 명주인 이강주와 함께 해장술로 모주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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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술지게미에 물과 한약재를 넣고 끓인 거라는데 요새는 그냥 막걸리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고, 왕의 엄마든 그냥 술고래의 엄마든, 엄마가 만든 술이라서 모주라고 하니 오늘 우리 집에서 만든 모주도 모주는 모주인 셈. 맛도 시판 모주와 비슷하였다. 이 모주를 베이스로 소주를 섞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요구르트 소주, 레몬소주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1인)
팔팔 끓인 모주는 약술이 맞을 것 같다. 알코올이 거의 없고 생강, 계피를 꽤 진하게 넣어도 잘 어울린다. 나는 청귤청을 넣었는데 귤껍질이나 과육, 레몬등의 비타민 C가 듬뿍 들은 과일들, 배와 같이 약용 작용을 하는 과일들을 넣으면 정말 감기나 피로 해소에 좋은 음료가 될 것 같다. 우리 아빠가 예전에 구기자며 하수오, 오미자 등을 직접 사 오셔서 담금주를 담으시며 이것들 다 약술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소주 알코올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마저도 한약재의 성분이 채 우러나기도 전에 성급히 드셨던 약술 아닌 약술들과 아빠도 함께 생각나게 해 준 모주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