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멋쟁이 한제 Feb 20. 2023

산삼 먹은 며느리.

여보, 미안해요. 

 신랑이 말한다. 이번 주일에 집에 (시댁)에 좀 오래, 왜? 뭐 좀 먹으라고. 뭘? 아니, 누나랑 (시누이)랑 너랑(나) 뭐 좀 먹어야 한대. 아니 대체 뭘? 왜? 


신랑의 화법은 대개 이렇다. 나는 성격이 급한 데다 아이를 키우며 더 급해져서 두괄식 대화를 선호하는 편인데 신랑은 무슨 아부지 돌 굴러가유. 수준의 느긋한 성격이고 화법 역시 그러하다. 제 딴에는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도대체 세 문장 말하는 동안 요점이 하나도 안 나왔다고 열불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점인 즉, 시부모님께서 산삼인지 뭔 지를 두 뿌리를 선물 받으셨는데 열이 뻗치는 체질이라 먹기가 곤란하니 추위를 타는 딸과 며느리가 먹으라고 하신다는 것, 근데 대충 먹을까 봐 어머님 보시는 앞에서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하니 집에 들러서 먹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 제발, 그게 그렇게 뜸 들이며 말할 일이야? 


신랑은 대게 그렇다. 그런 느긋함과 관대함이 나를 편안하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속에서 천불이 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최대한 요점만 간추려서 알아듣기 쉽고 간략하게 핵심만 먼저 전달하는 편이다. 제일 중요한 얘기를 해 놓고 그다음에 부가적인 수다를 떠는 편인데 신랑은 정 반대다. 뜸을 먼저 많이, 많이, 들이고 그다음 우물쭈물 본론을 꺼낸다. 그게 연애 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일이 별로 없었고, 주로 내가 얘기하고 신랑이 들어주는 편이었으며 특유의 관대함으로 나의 예민하고 뾰족한 기질을 다 받아주니 나는 그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내가 가장 나 일수 있게 해 주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그때, 내가 결혼을 한다 했을 때, 그렇게 반대를 하시던 분이 계셨다. 신랑을 반대하신 게 아니라, 결혼을 반대하신 것이다. 같이 일하던 학원의 교수부장님이셨는데, 어느 날 퇴근 후, (학원의 퇴근은 밤 아홉 시) 맥주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엘라선생님, (그때 학원에서 나를 그렇게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잘 알잖아, 그 사람 단점 있잖아. 결혼을 하면, 그 단점이 백 배가 된다? 아니 천 배가 된다니까? 그래도 괜찮으면 그럼 결혼해도 되는데 살아보면 있잖아, 아니야. 진짜 결혼하지 말고 연애만 하면서 살아. 결혼하면 힘들어. 이래 저래 다. 나는 도저히 그 말의 뜻을, 의미를,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해한다면 그건 아가씨가 아니었지, 최소 인생 2 회차거나. 


이제 결혼 9년 차, 신랑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보고 느끼는 신랑의 면면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신랑은 원래 느긋하고 관대하며 말주변은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애할 땐, 재잘거리는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한없이 친절한 남자 친구이었다. 지금은? 무슨 가정 내 공지사항이 있을 때마다 나한테 혼나는 큰아들이 되어버렸다. 두괄식 두괄식! 을 외치는 나와, 뜸을 들이며 밑밥을 까는 그. 기질과 성격의 차이이며 그게 반대로 신랑이 두괄식의 남자이고 내가 밑밥 까는 여자였다면 무슨 말을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던지냐고 혼이 났을 것이다. 신랑은 이러나저러나 혼나는 운명인가 보다. 


그래서 어제 시댁에 잠깐 들려 시어머님의 감시 아래 산삼을 꼭꼭 씹어 먹었다. 시어머니는 전라도 출신의 집밥의 대가 이신대 밥을 새 모이처럼 조금 먹으며 비쩍 마르고, 손발이 차디 찬 며느리가 영 걱정이시다. 아마 어머님 평생에 밥을 이렇게 조금 먹는 사람은 처음 보셨을 것이다. 우리 집에선 식구들이 다 밥 조금에 반찬을 많이 먹는 편이라 아무도 나에게 밥 조금 먹는다고 뭐라 하지 않는데 시댁에서는 밥을 그거 먹고 어찌 사냐고 언제나 걱정이 한가득이시다. 그래서 산삼이며 흑염소며 뭐든 생기는 대로 나에게 주신다. 나이 드니 건강 보조 식품들을 많이 선물 받으시는데, 열 뻗치는 체질이라 못 드신다고, 너 먹으라고.


산삼을 꼭꼭 씹어 먹고 왔어도 내 손발은 여전히 차다. 다만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사람이 얼굴 다르고, 지문 다르고, 체질 다르듯, 성격도 다른데, 나랑 다르다고 해서 신랑을 너무 혼내지 말아야겠다고. 나한테 혼이 나도 신랑은 특유의 느긋함으로 언제나 나를 받아주고 금방 까먹는다. 두고두고 기억하며 신경 쓰는 사람은 오히려 나다.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편히 못 잔다는 게 이럴 때도 적용이 되나.


    

꼭꼭 씹어 먹었다. 먹고 나서 신랑 옆에 가니 냄새난다고 저리 가라는 표정을 지어보여 나의 레이져 눈빛을 받았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코스트코 버섯 소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