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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Feb 23. 2023

특별한 호박죽 이야기.

 지난가을부터 나의 주방 한편에 앉아 있던 늙은 호박 하나를 잡았다. 그 호박은 “썰다” , “손질한다”라는 말고 “잡다”라는 술어가 왠지 더 어울린다. 나는 그런 크고 단단한 식재료를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신혼 초에 식칼로 무를 썰다가 칼이 중간에 박힌 채로 도로 빼지도 꽉 눌러 무를 마저 썰지도 못한 채, 정말 빼도 박도 못한 채로 발발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보다야 아줌마 지수가 많이 상승해서, 이제 무 정도는 손목이 조금 힘들어도 조심해서 다룰 수 있어졌지만 호박은 스케일이 달라 보였다. 꼭지에 칼 끝을 박아 넣었다가 칼이 빠지지 않으면 어쩌지, 저렇게 칼의 길이보다도 지름이 큰 호박을 어떻게 썰지, 껍질을 어떻게 벗긴담, 감자칼도 안 들을 것 같은데. 


 

그 호박은 지난가을, 그러니까 핼러윈 데이 전에 아이들과 핼러윈 꾸미기를 하려고 준비해 두었는데, 펌킨 카빙을 하여 잭 오 랜턴을 만들고 하루 후에 잡아 죽을 끓이거나 펌킨 파이를 만들어보려 했던 것을 도무지 엄두가 안나 그냥 장식으로 두었던 것이다. 한 계절이 넘어가는 동안 주방에 앉아있던 호박을 지난 주말에 잡았다. 내가 호박죽을 좋아하기도 하고, 소화 불량이 친구인 나에게 죽은 생필품이기도 하며, 얼마 전 드라마 <일타스캔들>에서 해이 갖다 준다고 남행선 씨가 호박죽을 끓여 들고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 또 호박죽이 먹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그때 결심했다. 저 호박을 잡아먹어야지. 


 그 호박은 사실 좀 특별한 호박이다. 가을에 시골 사시는 이모가 저런 늙은 호박 몇 개와 고구가, 그밖에 농사지은 이것저것들을 엄마에게 택배로 보내 주셨고, 나는 아이들의 핼러윈 준비로 호박을 하나 얻어왔으며 나머지 호박으로 엄마가 끓여 주신 호박죽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모가 단풍이 너무 예쁘던 가을날, 갑자기 패혈증으로 쓰러지셔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헤어짐에 장례식장에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호박을 볼 때마다 이모를 생각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이모는 저 호박으로 호박죽 말고도 다른 음식을 많이 주었을 것 같았다. 알뜰하게 씨까지 깨끗이 씻어 말려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 호박은 꼭 내가 맛있게 요리해서 다 먹고 싶었다. 늙은 호박은 상처가 없으면 장기 보관이 가능한 식재료이고 보관만 잘하면 익을수록 맛있어진다 하니 다행이었다. 한 계절을 꼬박 주방에 있으며 왔다 갔다 하며 이모 생각을 하다가, 이제 잡아먹자. 혹시 모르니 남편이 있는 주말에 칼을 꺼내 들었다. 남편은 나보다 힘이 세니까. 



 호박 잡기는 물론 힘들고 어려웠지만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무처럼 빈틈없이 크고 단단한 채소가 아니고 일정 부분의 두께를 지나면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3-4센티 정도 칼이 들어가니 빈 공간이 느껴졌다. 아, 호박 속은 비어 있다는 걸 그때 새삼 알았다. 꼭지를 따 뚜껑을 열고는 애들을 불렀다. 엄마 도와줄 친구? 아이들은 뭔 재미난 일이 있나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숟가락을 하나씩 쥐어 주고 박박 긁으라고 하니 신나게 긁는다. 이게 호박 씨야. 이거 심으면 호박이 열려? 그렇겠지. 엄마도 호박씨를 땅에 심어본 적은 없지만, 씨를 심으면 열매가 열리겠지, 주렁주렁. 아이들을 불러 호박씨를 파 내고는 남편을 불렀다. 잘라서 껍질 벗기자고. 둘이 돌아가며 호박을 썰고 껍질을 깎는데 감자 칼로는 잘 안되어 과도를 들고 조심히 깎았다. 나는 칼을 다루다가 손에 몇 군데 스크래치가 났고 남편은 한 군데를 조금 베었다. 뒤늦게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냥 호박 조각을 도마 위에 올리고 칼질을 밑으로 썰듯이 하여 껍질을 썰어 내던데, 그건 생각지도 못하고 두 부부가 열심히 돌려 깎았다. 드디어 완성. 찜기에 호박을 쪄서 익힌 후 불려 놓은 찹쌀과 함께 갈갈갈갈 하고 갈아 죽을 끓였다.


 호박 하나를 다 죽으로 끓였으니 양이 엄청나다. 내가 몇 날 며칠 두고두고 잘 먹을 것이고 일부는 소분하여 냉동실에 들어가 또 한참 잘 먹게 될 것이다. 거의 매일 속이 안 좋은 나는 달달한 호박죽을 먹으면 속이 따뜻하고 편해져서 좋다. 이모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꼭 다 먹고 건강해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집에서 늙은 호박을 잡아서 호박죽을 끓이다니, 아줌마지수가 크게 상승한 기분이다. 이모가 보면 뭐라고 했을까? 됐다고 다친다고 저리 가라고 손도 못 대개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무식하게 저 호박 한통을 한꺼번에 죽을 끓이냐고, 일부는 전도 부쳐주고, 찌개도 끓여주고, 씨까지 손질하여 뭐 라도 먹게 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네가 어떻게 호박을 잡는, 손이 늙은 아줌마가 다 되었냐며 손을 잡고 기특하고 안쓰럽고 대견한 눈빛을 보내셨을까. 호박죽을 먹으며 다정하고 재밌었던 이모를 생각한다. 아마 가을에 늙은 호박을 볼 때마다 이모 생각이 날 것이다. 이모가 나에게 준 많고 많은 기억들이 호박을 통해 덩굴처럼 주렁주렁 열릴 것임을, 그렇게 이모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계실 것이다.      


https://brunch.co.kr/@niedlich-n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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