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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pr 21. 2023

소울 빠진 소울푸드

떡볶이.

 아이들이 떡볶이를 좋아해서 자주 해 준다. 내가 밀떡파 라서 냉동실엔 거의 밀떡이 있는데 밀떡이 떨어지는 날에는 떡국떡으로 해 주기도 한다. 애들이 아직 매운 걸 못 먹으니 언제나 떡볶이는 간장, 짜장, 궁중, 케첩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도 떡볶이를 좋아하니. 밀떡의 간이 푹 밴 쫄깃쫄깃한 맛이 좋다. 쌀 떡 보다 가볍고 유연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쌀떡의 꾸덕함도 좋지만, 난 밀떡이 좋다. 쌀떡의 매력이 Rich 한 것이라면, 밀떡의 매력은 Light 함이다. 내 인생의 소울 푸드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떡볶이이다. 나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을까.

케첩 기름 떡볶이

 시장에 가면 파는 가느다란 밀떡을 한 뭉치 사서 일일이 뜯어 한 입 크기로 잘라서 냉동실에 보관한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두면 꼭 떡볶이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사리로 휘뚜루마뚜루 쓰인다. 불고기나 김치찌개에 넣어도 맛있다. 아이들과 즉석 떡볶이 집에 가서 이런저런 사리를 시켜서 잔뜩 넣고 마지막에 치즈 볶음밥까지 먹고 나오는 것이 내 로망인데 이 놈들은 후추도 매워해서 아직은 그날이 요원하기만 하다. 너무 간장, 짜장으로만 떡볶이를 해 주는 것이 내 성에 차지 않아 전혀 맵지 않은 파프리카장을 사서 빨간 떡볶이를 해 주기도 하였다. 질감이나 비주얼은 완전한 고추장인데 정말 하나도 안 맵다. 파프리카의 향도 나지 않아 진짜 고추장에서 매운맛을 완전히 뺀 느낌이다. 거기에 4분의 1 티스푼만큼의 일반 고추장을 넣어 떡볶이를 만들어 준다. 애들은 엄마가 해 준 빨간 떡볶이는 맵지 않다고 잘 먹는다. 다른 아이들은 그냥 시장에서 파는 보통 맛 떡볶이 정도는 잘 먹는 모양이던데 유난히 매운맛에 약하고 예민하다.


어릴 적 엄마가 해 주던 떡볶이를 먹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있다. 학교 입학 전이었는데 엄마가 해 준 떡볶이를 물에 헹궈가며 먹었다. 외할머니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떡볶이를 포크에 찍어 쪽쪽 양념을 빨아 드시고 나에게 주시면 난 그걸 받아먹기도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물에 헹군 것보다 할머니가 양념을 쪽쪽 빨아 드시고 넘겨주신 떡볶이가 더 맛있었다. 아마 물에 헹군 건 양념이 완전히 씻겨서 그럴 거고 할머니가 주신 건 양념이 더 남아 있어서 먹기 딱 좋은 맛이 되지 않아서였을까 싶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을 해서 내 신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으로 스스로 떡볶이를 사 먹기 시작했다. 당시에 떡볶이 작은 밀떡볶이 한 컵은 50원, 큰 가래떡볶이 한 개는 100원이었는데 그때부터 밀 떡볶이를 좋아했다. 그때 먹었던 떡볶이는 조금 맵긴 했지만 물에 헹구거나 할머니의 손길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커서 그랬을까, 그 떡볶이에 뉴슈가가 잔뜩 들어서였을까. 엄마가 무슨 일로 학교 앞을 지나다가 떡볶이 사 먹고 있는 나를 보고는 사 먹지 말라고 복화술로 잔소리를 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길거리, 문방구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지 말라고 하는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때는 몰랐지만.

궁중떡볶이

 

내 인생에서 먹은 떡볶이를 헤아려보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중고등학교 무렵 하루 건너 한번은 꼭 먹었던 떡볶이에, 대학교 다닐 때에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식사로 간식으로 자주 먹던 떡볶이였다. 엄마가 해 주던 떡볶이에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달달한 주황색 떡볶이가 프랜차이즈의 옷을 입고 더 빨갛게, 더 맵게를, 더 비싸게를 슬로건으로 삼은 듯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금은 떡볶이를 먹는 날을 손에 꼽게 되었다. 아니, 집에서 떡볶이는 자주 먹지만 그 떡볶이에는 소울이 없어서 도무지 떡볶이로 쳐 줄 수가 없다. 간장에, 케첩에, 파프리카, 고기 따위가 들어간 떡볶이라니, 거기에 수다와 친구가 빠져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떡볶이가 아니다.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가고, 꼭 들어가야 할 것이 빠졌다. 팥 없는 찐빵은 취향 존중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친구와 수다가 빠진 떡볶이에선 도무지 떡볶이의 참 맛이 안 난다.  


미소 된장 오리 불고기 떡볶이

최근엔 무려 미소 된장 오리불고기 떡볶이를 해 먹었다. 간장이 지겨워 선택한 양념인데 맛이 괜찮았다. 미소 된장에 매실청을 넣고 오이고기를 재어 놓았다가 볶으며 떡사리를 넣어 먹은 건데 생 오리고기도 잡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고 쫄깃한 떡 사리가 중간중간 있으니 아이들도 잘 먹은 반찬이다. 간장, 짜장, 케첩, 모든 소스종류를 다 섭렵하고 있는데 왜 고추장의 산을 넘지 못하고 있는지. 아쉽기만 한 순간이었다.


떡볶이를 자주 먹으면서도 떡볶이가 그립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깔깔 거리며 먹던 그 떡볶이, 흰 교복 앞섶에 어김없이 빨간 국물이 튀어 먹은 존재감을 팍팍 풍기던, 아마도 엄마가 싫어했을 그 떡볶이가 그립다. 옛날엔 흔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주황색 떡볶이도 그립다. 요즘엔 빨갛고 엄청 매운 프랜차이즈 떡볶이가 대부분이고, 떡볶이 본연의 존재감보다는 중국 당면 같은 각종 사리들이 지분을 많이 가져가는 느낌이다. 그런 떡볶이들은 먹을 때는 맛있는데 먹고 나면 오히려 허전하고 몸이 아프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요즘 떡볶이를 소화하지 못하는 탓이 크겠지만 떡볶이는 친구와 먹어야 제 맛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틈은 아들도 남편도 채워주지 못한다.


어제 아이들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떡볶이 트럭을 보았다. 떡볶이가 먹고 싶으니 엄마가 나중에 집에서 안 맵게 해 달라고 한다. 그래, 나중엔 친구랑 한 번 사 먹어봐. 친구랑 먹으면 더 맛있어. 하고 대답해 주었다. 아들들에게도 통할까. 떡볶이에 들어간 친구와 수다라는 조미료가 얼마나 마법과 같은 존재인지.    


엄마와 친구들이 먹은 고등학교 앞 떡볶이. 이것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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