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옛 말 틀린 것 하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그중 하나가 배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이다. 예전에, 내가 한창 배울 때는 몰랐다. 지금 내가 배우는 때라는데, 이렇게 놀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와 할 얘기도 많고, 공부 말고도 궁금한 것 투성이인데 왜 하필 지금이 배우는 때 인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뭘 배우기에는 어른들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소녀의 눈에는 어른들은 무언가 진득하게 할 수 있는 동기가 있었고, 다른 무언 가에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도 있어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동기는 있을지언정 일하랴 뭐 하랴 도통 시간이 나질 않는 것이 어른의 삶이었고, 생존에 흔들리지 않으려 다른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어른의 삶이라는 걸.
내가 무언 가를 새로 “배운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중국어를 새로 배운 것이 마지막인 것 같다. 영어학원에서 일을 하며 새로 배운 것은 글쎄, 학부모 상담 스킬? 그런데 그것도 주워듣고 얻어 듣고, 피드백을 받다 보니 실력이 는 것이지 배웠다고 하기엔 좀 그렇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어는 영화 인사이드아웃에 있는 기억저장소에서 꺼내다 쓴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장기 기억 저장소에 묻혀 있는 나의 학창 시절 영어 학습의 기억들과 아이들을 집중시킬 만한 모든 에피소드들을 고서적 찾듯 열람하여 꺼내와 수업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편안해졌을 뿐, 새로 배운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학원 수업을 몇 년을 하다 보니 새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기타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학원의 같은 건물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문의를 하니 내가 수업이 끝난 밤늦은 시간에도 레슨이 가능하다 하여 등록을 하였다. 나는 성당에서 피아노 반주와 오르간 반주가 가능할 만큼 피아노를 칠 줄 알고 기본 코드를 다 알고 있으며 코드 반주가 가능한 사람이라 금방 “배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른바 꼼수를 부리는 것, 이를 테면 도미솔을 쳐야 하는데 손이 아프니 도와 솔만 치는 격으로 나는 악보를 잘 보지도 않고 꼼수만 부렸다. 그리고 정말 식상한 핑계이지만 연습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일 끝나면 한 밤중, 나도 힘든데 기타 학원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아니면 오전시간에 열심히 기타만 연습해야 될까 말까인데 그럴 열정도 없었다. 조금 쉬어야 했고, 먹어야 했고, 다른 볼일이 있으면 볼일을 보고 출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일 끝나고 맥주 한 잔을 핑계로 레슨에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지경이었다.
첫 아이가 돌이 지났을 때, 그러니까 2017년 여름,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일본여행은 공항 경유 말고는 처음이었다. 여행과 언어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여행 가는 나라의 간단한 말을 꼭 배워가고 싶어 히라가나 가타카나 외우기에 도전했다. 최소한 읽고 쓰고 간단한 주문은 내가 해 보고 싶었다. 결과는 대 실패, 아이를 안고 어르며 히라가나 가타카나 외우다가 애를 잃어버릴 지경이라 며칠 하다 포기했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배움에 때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나의 때는 이미 지났음을.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났다. 손가락 번호에 맞추어 천천히 연습을 했고, 선생님이 내 주신만큼 동그라미에 색칠을 해 가며 집에서도 연습을 했다. 연습할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르니 거짓으로 동그라미에 색칠만 해 갔다가는 대번에 들통이나 혼이 났으니 연습은 필수였고 연습을 하니 실력이 늘었다. 배움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강제의 힘이 작동할 때에.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도 생각났다. 니하오도 모른 채로 중문과에 입학을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살다 오거나 화교 친구들이 중국어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사례가 꽤 있어 니하오도 모른 채로, 학원도 다니지 않고 순결한 뇌를 가지고 중문과에 입학한 친구는 별로 없었는데 내가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니 열심히 했다. 일일이 써 가며 성조며 발음 연습을 했고, 중국어 어학연수를 가서도 틈틈이 필기와 표현을 정리하고 드라마 한 편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시간은 충분했고, 배우려는 의지도 충만했다. 그게 내가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때”였다.
최근 몇 년간 무언가를 “배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못 하던 걸 할 줄 알아진 것들은 많이 있지만 애써 시간 내어 배웠다기보다 그냥 알게 되고 익힌 것이다. 아기를 돌보는 것, 아세트 아미노펜, 이부프로펜과 같은 해열제의 종류들, 우리 아이들에 입맛에 맞추어 식사를 차려 주는 것과 같은 주로 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틈틈이 책을 읽긴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책들이라기보다는 소설과 그림책 위주였고 그 와중에 내가 도를 깨치기도 하는 순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내가 최근에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바로 체스. 큰 아이가 어디서 알았는지 체스를 두고 싶어 해서 엄마는 체스를 둘 줄 모르는데 어쩌지, 하며 일단 책을 사 주었다. 아이와 책을 함께 읽으며 기물의 이름을 외우고 행마법이라고 하는 기물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아이와 체스를 함께 두어 줘야 하는데 내가 둘 줄을 모르니 책을 보고 유튜브를 보며 체스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체스판을 세팅하는 것도 책을 보고 해야 할 만큼 왕초보였지만 지금은 기물의 움직임까지는 다 외운 상태이다. 같이 시작했는데 아이가 나보다 더 잘한다. “엄마, 지금 체크야. 이거 안 움직이면 나한테 져.” 하고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하고 자기가 머리를 써서 엄마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나는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세상을 꾸역꾸역 살고 있는 느낌인데, 아이는 체스를 두며 두 수, 세 수를 앞서 계산하는 것이 신통방통하다. 엄마가 능숙하게 잘하는 것이라야 아이에게 가르쳐 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쉽다. 잘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배우면 더 잘할 것 같아 근처에 체스 가르쳐주는 곳이 없나 찾아보는데 바둑학원은 많아도 체스 학원은 없다. 어릴 때 체스를 잘 배워 두면 평생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언어나, 생활, 예절, 요리처럼 엄마가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마음이 크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유튜브 보고, 책 보고 배워서 틈틈이 아이와 체스를 두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엄마와 체스를 두면서도 그 틈에서도 무언 갈 배운다. 엄마가 너한테 좀 배우게 알려주면서 하라고 미리 얘기해 두면 친절하게 자기의 앞 수를 알려주며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라고 일러준다. 그렇게 눈과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2507일을 키웠더니 나 보다 잘하는 것이 생겼구나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앞으로 이 아이의 수많은 배움에 체스와 엄마의 기억이 탄탄한 밑바탕이 되길 바라기도 한다.
나의 새로운 배움은 끝난 줄 알았는데 아이 덕에 새로운 체스를 배우게 되어 고맙다. 중국어를 배웠던 그 이후로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패하고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배움에는 때가 있지만, 사람은 평생 무언 갈 배울 수 있는 상태라는 걸 되새긴다. 조금 느려지고, 확실히 예전 같지 않고, 배울 만한 동기, 마음, 기회가 적어질 수는 있지만 배움의 때가 지났다고 해서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인생에 하나도 득이 될 것 이 없다고,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자식 한의대 보내고 싶으면 엄마가 직접 공부해서 가라는 김미경 강사의 명언도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