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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04. 2023

생각을 짜내는 아이

<몰라>와 <그냥>을 넘어서기. 

아이가 커 가며 많이 하는 말이 생겼다. 몰라, 와 그냥. 어떤 일의 과정이나 감상, 이유를 묻는 질문에 보통 그렇게 대답한다. 책의 내용이나 감상을 묻는 말에 그렇게 대답하면 그래, 아직은 어려울 수 있지. 생각하기 싫고 질문하는 엄마가 귀찮을 수 있지 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더구나 “어떤 일” 이 있었을 때 그런 만사가 귀찮은 태도로 나오면 좀 곤란했다. 아들치고는 꼼꼼하고 차분한 면은 있다. 하지만 곰살맞고 살가운 면은 전혀 없는 그냥 무뚝뚝한 아들이다. (참고로 나는 딸 셋 중 막내다.) 가족 카톡방을 쉬지 않고 울려 대는 막내딸 엄마는 아들의 몰라, 와 그냥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요새같이 에세이 쓰기가 대세로 자리 잡은 세상에, 그리고 다정한 남자가 인기 있는 세상에 내 아들이 그렇게 두 단어로 이야기하는 걸 그냥 볼 순 없었다. 그게 타고나길 그런 거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거든, 아니면 어휘력이 부족한 것이든. 저절로 안 되면 연습하는 수밖에. 아니 연습시키는 수밖에. 



처음엔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며 질문을 몇 개 던져 보았다. 역시나 대답은 몰라와 그냥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데 자꾸 질문을 받으면 그 책이 싫어질 것 같아서 좋아하는 책은 그냥 읽어만 주기로 했다. 그 대신 그런 걸 할 전용 책을 준비했다. 간단한 질문을 써 두고 자신의 생각을 써넣도록 노트도 직접 만들었다. 모르는 어휘를 스스로 찾아보도록,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여 짧은 글을 짓도록, 책에 나오는 상황을 재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써 보도록 일종의 독서 논술 노트를 만든 것이다. 나의 야심 찬 독서논술 노트를 본 현직 초등교사 친구는 너무 훌륭하다며 근데 타이핑을 좀 하여 나중에라도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하였지만 나는 어쩐지 손글씨가 아직 더 좋다. 참고로 책은 당근마켓에서 구입하였다. 집에 있는 디즈니 명작동화로는 왠지 독서 논술을 하기 싫었다. 나도 디즈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그 책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건 나의 정서에도 좋지 않을 듯 하기에. 디즈니는 그냥 보고 즐기는거지 분석하고 느낌 적는거 아니다. 


처음이라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여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맛보기로 시작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엄마가 또 뭘 하려고 하나 하는 반응이었지만 큰 아이는 이리 와 앉으라면 순순히 앉는다. 말을 잘 듣고 호기심은 있다. 책을 두 번씩 읽어주고 독서 논술 노트로 넘어가니 의외로 흥미를 가진다. 쓰는 글씨의 양이 많을 것 같아 걱정하였는데 그간 그림일기를 쓰며 단련된 손근육이 있어 그 정도는 힘들어하지 않았다. 띄어쓰기에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그리고 노트를 예쁘게 꾸밀 수 있도록 무지 공책을 준비했더니 역시나 띄어쓰기가 엉망이다. 하지만 이 공책은 띄어쓰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펼쳐보도록 준비한 공책이니 띄어쓰기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에는 역시나 <몰라>가 출몰한다. 생각하기 귀찮다는 뜻이다. 질문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색하고 말했다. 이 공책에는 몰라는 없다고, 참고로 그냥 도 없다고. 생각날 때까지 생각해서 써야 하는 노트이고 이걸 마치면 오늘 그림일기 쓰기는 봐주겠다고 당근과 채찍을 걸었다. 과연 받아 먹을까 걱정했는데 아들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림일기를 안 써도 돼? 그렇다면 한 번에 OK!!


쥐어 짜낸 문장들, 곧 술술 풀리게 될 거라 믿어요.

그림일기 쓰기는 이제 그냥 혼자 쓰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다. 하지만 이 독서논술은 옆에 끼고 해야 해서 나도 사실 귀찮다. 그래도 정확하고 바른 문장으로 문맥에 맞게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쓰게 해야 하니 옆에서 봐줘야 한다. 문장에 어울리는 종결어미와 호응관계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쓰도록 챙겨주었다. 그런 간단한 한국어의 규칙은 군말 없이 따른다. 모르는 단어를 스스로 찾아보게 하여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로 알아보게 하고 짧은 글 짓기를 통해 단어의 어감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파악한다.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모른다면서도, 그냥 이라면서도 찾아서 쓰고 이유를 둘러대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하다. 


고약하다의 예문에서 빵 터졌다.

아이는 지금 생각을 쥐어 짜내고 있다. 몰라와 그냥이라는 높은 허들을 내 손을 잡고 내가 놓아주는 계단을 올라 꾸역꾸역 넘어보는 첫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아이가 생각을 펼치기를 바란다. 상상의 나래를 펴기를 바란다. 이렇게 재밌는 책과 영화, 콘텐츠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적절한 감상과 느낌을 함께 내어 놓을 수 있다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기에. 몰라와 그냥이라는 딱딱한 껍질에 쌓인 말랑말랑한 생각과 느낌들을 밖으로 내놓는 연습을 꼭 시키고 싶다. 어휘를 늘리고 문장력을 향상하는 것은 사실 둘째 문제이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기를, 나는 그것을 바란다. 


생각을 쥐어 짜내고 있는 아이야, 딱딱한 마음에 조금의 구멍이라도 난다면 네 안에 있는 말랑 말랑한, 엄청난 것들이 작은 구멍으로 졸졸 흘러나올 거야. 그러다 보면 구멍은 버티지 못하고 더 커지거나 깨질 것이고 그러면 생각을 펼치고, 상상의 날개가 펴지고, 너의 세상도 넓어질 거야. 엄마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해.) 




#엄마표독서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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