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목적지는 경복궁, 고속도로가 밀리기 전 아침 일곱 시 반에 출발해서 40분 만에 도착하였다. 경부고속도로가 꽉 막힌 시간이라면 두 시간도 넘게 걸릴 텐데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주차를 하고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니 경복궁 입장 시간이 되었다.
경복궁에 찾은 건 궁중문화축제를 보기 위해, 아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신비아파트와 콜라보를 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신비아파트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귀신, 요괴 만화인데 여름에 조선퇴마실록이 새로 나올 예정이라 경복궁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갓 만들기도 있고, 카드도 선물로 주고, 스마트폰을 빌려 경복궁 여기저기를 돌며 귀신을 잡는 게임도 있다. 신분증을 내야 스마트폰을 빌릴 수 있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지갑을 안 가져가는 바람에 두 아이가 스마트폰 하나 밖에 못 빌려 실랑이가 조금 있었다. 아이들은 신비가 먹고 있는 약과를 가리키며 약과다 약과!! 를 외친다. 그래, 약과는 임금님 정도 되어야 즐길 수 있었던 고급 간식이었다지. 여하튼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궁궐에서 퇴마 실록이라니, 내용이 어떨지 궁금하다.
약과다 약과!
아이들과 지난번에 경복궁을 찾았을 땐 근정전을 둘러보고 왼쪽으로 가서 경회루까지 보고 나오는 코스로 짧게 둘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 지 사진 찍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이번엔 근정전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동궁도 가보고 더 깊이 교태전까지 들어가서 구경을 하였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사람이 많이 없어 호젓한 궁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동궁 쪽으로 들어가니 큰 나무가 있어 간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쪽에 동궁전을 마련하여 왕세자의 거처를 두었다니, 가장 이른 아침의 햇볕을 받으며 일찍 일어나 생활해야 했던 왕세자의 삶도 녹록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호젓한 뒷길
거닐다 보니 생과방, 소주방이 나온다. 왕의 음식과 간식들을 만들던 곳인데 미리 예약을 해야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우리는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었다. 경복궁의 바깥쪽은 북적이지만 안쪽은 호젓하다. 나무그늘과 처마밑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쉬기에 좋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낮고 부드러운 곡선들이라 그런지 마음도 한결 편안하고 고와지는 느낌이다.
북적이는 근정전
오랜만에 나온 광화문광장도 새로웠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버스 다니던 찻길이 언제 없어진 건지, 문화 공간으로 조성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분수 구경을 하고 누워서 하늘 보고, 구름 보며 쉴 수도 있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여기저기를 관광하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보니 새삼스레 회복된 일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나 이제 혼자 서울 오면 버스 어디서 타야 하는지도 모를 것 같아.>라고 하니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되지 뭘 버스를 못 타냐는 퉁이 돌아온다. 그는 내가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잃는 길치라는 걸 잊었나 보다.
보통 나들이를 나오면 아이들이 먹을 만한 음식점으로 찾아가는 편인데 오늘은 오랜만에 추억의 김치찌개 식당으로 들어갔다. 대학 시절 몇 번 와본 곳인데 그 20대의 내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안주삼아 소주를 먹던 식당이 그대로 있다. 오늘따라 소주가 다네, 쓰네 하던 대학생은 아들 둘에게 백김치 한 입을 먹여보려 애를 쓰는 아줌마가 되었다. 백김치 한 입을 먹여보려는 나와 싫다고 인상을 쓰는 아들이 꼭 소주를 마시고 캬아, 하던 나의 그 표정과 비슷하다. 세월이 지났고, 사람은 변했고, 없던 사람도 생겨났지만 식당은 그대로다. 모습도 그대로, 맛도 그대로. 다음엔 아이들과 김치찌개를, 그다음엔 아이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일 때도 그 집이 그 모습 그대로이길 바라본다.
북적이는 근정전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호젓한 동궁전이 나오듯, 광화문 대로의 높고 넓은 빌딩에서 조금 더 뒤로 가면 오래되고 정겨운 노포집이 나오듯 항상 무언가로 바쁘고 복잡한 나의 생활과 마음도 조금만 방향을 틀어보면 어떨까 생각하였다.
봄날의 서울구경은 행복하였다. 꽃가루가 폴폴 날려 비염이 있는 우리 집 세 남자는 재채기를 멈추지 못했지만, 적당한 햇빛과 바람, 북적임과 호젓함 사이에서 즐거운 추억 하나를 새기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