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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Aug 28. 2022

칠면조 구이가 먹고 싶다면

토종닭이라도 구워드리는 게 인지상정!

발단은 엄마표 영어공부였다. 영어 글짓기를 하는 부분에 칠면조에 대해서 나왔는데 칠면조에 생물학적으로는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칠면조 고기에 대해 아이에게 쓰도록 유도했고, 아이는 디즈니 명작 만화에 툭하면 등장하던 칠면조 구이를 기억해냈다. 내친김에 내가 미국 이모 댁에 머무르던 시절, 이모가 차려주신 추수감사절 한 상을 기억해 내 싸이에서 발굴해 보여주었다. 진짜 칠면조 구이는 이렇게 생겼다고. 그다음은 당연한 수순. 엄마, 나도 먹어보고 싶어.


안다, 알아. 칠면조는 사실 먹어보면 별 것 없는데 우리나라에선 흔치 않다 보니 궁금한 게 당연하다. 붕어빵의 앙꼬, 생일상의 케이크처럼 홈파티의 화룡점정을 찍는 그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자태, 맛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 존재감이 궁금할 터.




모든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큰 아이의 뭐가 먹고 싶단 말에 유독 약하다. 2.3킬로의 저체중아 출신에 지금까지도 반에서 가장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큰아이가 뭐가 먹고 싶다 하면 귀가 번쩍 뜨인다. 근데, 칠면조는 그리 만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알아보니 쿠팡 로켓 프레시로 냉동 통 칠면조를 살 수는 있었는데(5.5킬로, 6킬로), 너무 평범한 사이즈의 우리 집 가정용 오븐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훈제 칠면조 다리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아이가 원한 건 통 칠면조 구이를 영접하는 것일 테니 이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토종닭. 부탁해.


최근에 복간된 디즈니 명작동화, 내가 어릴 적 읽던 동화를 아이들도 읽는다. 나도 저 칠면조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칠면조 먹고 싶단 말을 흘려 듣지 못했나보다.


관련 유튜브들을 찾아보니 세상에, 껍질에 버터 칠갑 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칠면조 고기 안으로 주사기로 직접 버터를 주입하는 미국 아주머니도 계셨다. 인젝터블 버터 Injectable butter. 뭐라? 버터를 인젝트 한다고? 정말 있었다. 해외배송으로 살 수도 있었다. 인젝터블 버터, 고기에 육즙이 가득 흐르게 해 주는, 버터를 포함한 액상 조미료인 듯했다. 딴 걸 떠나서 나는 주사기에 꽂혔다. 애들이 신나 하겠다.


유투브 캡쳐. 만드는 법은 다 달랐지만 결과물의 비쥬얼은 대동소이 했다. 모두 그림책에 나오는 저 칠면조처럼 되어 오븐에서 나오더라.



인젝터블 버터는 해외 배송으로 구매할 수 있었는데 내가 어쩌다 쓰는 걸로 집에 두기에는 너무 대용량이라 그냥 정보를 뒤져 내가 대충 만들기로 했다. 성분표를 보니, 이런저런 조미 시즈닝에, 물, 치킨 액기스, 버터 향미 이런 것에 잔탄검이 들어가던데 잔탐검은 유화제의 용도로 쓰인 것 같아 나는 물, 액상 치킨 스톡, 녹인 버터, 집에 있는 온갖 가루 시즈닝들에 우유를 한 바퀴 둘러 따뜻하게 데워 휙휙 저었다. 뭐가 냄새가 그럴싸했다. 아. 온갖 가루에는 맛소금 포함. 우리 집엔 애석하게도 미원이 없다. (사야겠다)


사는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비쌀 뿐.


Are you READY? 내가 만든 인젝터블 버터도 보기엔 파는 것 비스무레 했다.


아이들에게 이건 닭이지만 오늘은 칠면조인 셈 치자 하고, 주사도 놓게 하고, 버터 칠갑도 직접 하게 하고 함께 구울 채소들을 소개해 주었다. 코리안 생 허브 대파를 넣고 싶었지만 최대한 서양 느낌을 내고 싶어 셀러리와 아스파라거스로 초록색을 대신했다. 그리고 실로 꽁꽁 묶어 오븐행. 닭이 칠면조가 되는, 아니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익는 두 시간 동안 나는 냉장고 채소들을 털어 샐러드 야채를 준비하고, 으깬 감자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아빠하고 축구하고 오라고 내쫓았다.


주사는 아이들이, 포박은 아빠. 나는 아직도 생닭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싫은데 아이들인 이건 다리? 이건 날개? 이거 긴거는? 목?? 얘는 그럼 죽었어?


닭이 구워지니 근사한 냄새가 난다. 한번 꺼내 상태를 점검하고, 아스파라거스를 추가하여 다시 오븐에 잠깐 넣고 쏟아져 나온 육즙과 기름을 일부 덜어내어 그레이비소스를 만들었다. 버터와 밀가루를 볶다가 케첩, 우스타 소스, 물, 우유 조금에 치킨 육즙과 기름을 더해 저어가며 끓이니 맛이 괜찮다. 어벤저스급 재료들이 들어갔는데 맛이 없으면 안 되지.


최대한 갈색을 뽑아 내었다. 실중량 2키로 짜리 토종닭을 토종닭 농장에서 인터넷 구매 하였다. 마트에서 보통 파는 토종닭은 1.1키로 에서 1.3키로 정도 이다.


테이블 셋팅을 마치니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땀에 쩔어 들어왔는데 정말 동화책에서 본 것 같은 칠면조, 아니 토종닭의 자태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조금씩 접시에 덜어 담아 주었다. 닭이라 손으로 들고 뜯고 싶었지만, 나이프로 잘랐다. 그러다 결국엔 손으로 잡고 뜯었다. 버터 주사의 효과는 확실했다. 토종닭의 닭가슴살에서 육즙이 터져나와 촉촉했다.


아빠에게 돌아간 똥집. 맛이 없었다. 아이들이 껍질을 좋아하는데 나랑 취향이 겹쳐서 나는 껍질을 많이 못 먹었다. 원래 닭껍질은 다 내꺼였는데


신랑이 말한다. 그레이비소스를 처음 먹어보는데 맛있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아무리 서양 느낌 나는 요리 한 상이라도 이 마늘에서는 닭백숙의 마늘과 똑같은 맛이 난다고 말이다. 우리 집의 디즈니 파티는 이렇게 끝났다. 사실 곱게 끝난 건 아니다. 엄청난 설거지를 떠 안겼으니. 닭기름과 버터의 조합으로 설거지 난이도는 역대급이었다. 둘째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내가 요술 테이블 구해줄게. 다음에는 엄마가 눈 감고 테이블아 상 차려!!! 그러면 칠면조 구이가 차려질 거야. 고맙다고 인사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그냥 돈 떨어지는 요술 당나귀 구해주련.


엄마가 저 도널드 아저씨보다 더 기쁘게 환호 할 수 있어.


오늘은 내가 차린 식탁에서 미국 이모 생각을 했다. 3년 전 돌아가셨는데, 아마 살아 계셨다면 나는 이 사진들을 카톡으로 보내고 보이스톡을 걸었을 것이다. 이모는 그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깔깔 웃으며 재미있어하셨을 것 같다.


2007년도, 미국에서 보낸 추수감사절.


나의 미국 이모는 추수감사절 디너로 칠면조 구이, 매쉬드 포테이토, 쉬림프 알프레도, 펌킨 파이, 샐러드, 나와 이모 단 둘을 위해 이렇게 한 상 가득 차려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한상 차림에는 실력이, 노력이 부족하다. 아마 이모는 뭐하러 집에서 힘들게 그러냐며 사 먹으라고 하셨을 게다. 너 왔으니까 해준 거지, 하고 말이다. (이모도 집에서 요리를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칠면조로 분(扮)한 연기대상감 토종닭, 소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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