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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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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과를 한 박스 샀다. 가정용 흠과 이다. 무려 10킬로. 내가 사과를 무척 좋아해서 잘 먹고, 잘 먹이니 10킬로 사도 다 먹는데 무리가 없어서 햇사과가 나오는 9월부터 다음 해 5월 말, 수박을 비롯한 여름 과일이 나오기 전까지 사과는 10킬로씩, 10킬로씩 우리 집에 온다. 거의 가정용 흠과로 주문한다. 흠과는 수확 과정이나 날씨 영향 등으로 표면에 흠집이 나서 정품으로 시장에 나올 순 없지만 먹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과일이다. 어느 마트에서는 흠과 라는 말의 흠이 부정적 느낌을 주어서 보조개 사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오히려 보조개 사과라는 말이 더 어색했다. 흠이 있지만 먹는덴 아무 문제가 없는 과일, 방점은 과일에 찍혀야지 굳이 흠을 보조개로 포장하여 무심히 지나갈 상처를 오히려 눈에 띄게 만드는 것 같았다. 흠과는 정품이 아니라 포장도 단출한데 그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정품, 최상품의 사과가 온갖 플라스틱 포장재를 뒤집어쓰고 비닐 뾱뾱이에 보자기까지 휘감고 나타나면, 나는 큰 어른, 너무 귀한 손님을 맞는 기분이 들어 황송스럽고 과분한 마음에 마음 편히 사과를 까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크기도 커서 혼자 다 먹기가 부담스러우니 식구들이 다 모여서 함께 먹을 수 있을 때를 기다리다 보면 사과가 냉장고에 오래 있어 오히려 푸석하니 시들 때도 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흠과가 더 좋다. 옹기종기 이렇게 저렇게 생긴 사과들이 과한 포장 없이 모여 있는 박스를 보면 그냥 동네 마실 나온 우리 아줌마들을 보는 것 같아 정겹기도 하고 그중 작은 사과를 골라 혼자서 먹을 수도 있어 편하다. 한마디로 딱 좋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애플파이.


얼마 전에 그 사과 몇 개를 가지고 애플파이를 구웠다. 흠과 중에서 흠집이 상대적으로 큰 사과들을 골라 깎아서 설탕, 레몬즙, 시나몬, 크랜베리를 적당히 넣고 졸였다. 마지막에 버터를 한 조각 넣었고, 전분가루를 조금 넣으려고 했는데 남편이가 아이 둘을 데리고 심부름으로 간 마트 쇼핑에서 전분가루를 빼놓고 안 사 오는 바람에 못 넣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홈베이킹.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모두가 엄지 척, 엄지 쌍척을 날리는 맛있는 애플파이. 사과를 많이 넣었고, 사과 맛을 살리는 정도만 간을 하여 졸였으며, 파이 뚜껑엔 계란물 대신 설탕을 솔솔 뿌렸다. 유튜브에서 본 미국 할머니처럼. 그랬더니 더 바삭하고 달콤하고 촉촉한 애플파이 탄생. 가정용 흠과의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성격이 급해 전을 부칠때 후라이팬을 두개 꺼내 빨리 부친다. 채소전에 치즈 토핑은 언제나 맛있다.


나는 이렇게 정품이 못 되는 식재료 쇼핑을 종종 한다. 집에서 편하게 먹을 과일이 대표적으로 그렇고 진미채 파지라는 것을 사기도 한다. 다들 아는 그 진미채. 근데 가공과정에서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가루가 되거나 좀 모자라게 잘라지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파지라고 해서 인터넷 건어물 가게에서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다. 이가 약하고 이에 뭐가 끼는 것이 싫어서 오징어채를 별로 안 먹는 나와 아이들은 진미채 파지로 한 요리들을 잘 먹는다. 진미채 볶음을 해서 반찬으로 먹어도 되지만, 채소 전에 넣어 먹으면 그것이 또 별미이고, 볶음밥에 넣어도 좋다. 김밥에 넣기도 한다. 질기지 않고 먹고 먹이기가 편해서 나는 마트에서 파는 진미채 정품보다 파지가 더 좋다.     


명란 구이는 안 먹는데 저렇게 파스타를 해 주면 비벼서 잘 먹는 아이들


오늘은 명란 크림 파스타를 해 먹었다. 빨갛게 매운 양념이 된 명란젓은 아이들이 먹지 않아 잘 안 사게 되는데 무색소 저염 명란젓 파지를 싸게 팔길래 주문했다. 어차피 명란젓은 속을 긁어내서 먹는 경우가 많아서 파지여도 상관이 없다. 오늘은 크림 파스타에 넣었지만, 주먹밥, 계란찜 등 명란젓의 쓰임은 여러 곳이다. 정품이 아니어도 정말 상관이 없다.  


내 성향이 수더분한 건지, 알뜰한 건지, 아니면 저렴한 건진 모르겠지만, 난 정말 파지와 흠과 여도 괜찮다. 맛에 아무 문제없으면 되지, 하는 실용적인 생각, 값싸게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난 파지 단출함을 좋아한다. 그 귀한 대접 안 해주는 최소한의 포장, 플라스틱 포장재를 적게 내놓으니 마음이 일단 조금 편하다. 그리고 아무 데나 팍팍 넣으며 마음을 넉넉히 쓸 수 있어 그것도 좋다. 온갖 포장재를 휘감은 최상급 사과를 가지고 애플파이를 구울 수 있을까, 진미채를 작게 자르는 수고를 감내하며 볶음밥이며 전을 부쳐먹을까, 선물용 명란젓이라면 파스타 못 해 먹을 것 같다. 하얀 쌀밥에 참기름 둘려 고이 얹어 먹어야지.


백설공주의 파이


내가 선호하는 단출한 포장의 파지, 흠이 있지만 흠을 보지 않아도 되는 흠과, 파이를 구워 낼 수 있는 넉넉함. 요리를 하며, 식재료를 구입하며 또 한 번 완벽하지 않아도 됨을 느낀다.  여름을 견뎌 내고 수확철이 다 되어서 흠집이 난 사과가 울며 불며 이번 생은 망했다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정품이 되지 못한 진미채 파지들이 불공평하다고 세상을 등져버린다면, 옆구리가 조금 터진 명란젓들이 이런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요리사 만나기를 거부한다면, 그래서 완벽한 식재료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아니 나의 부엌은 얼마나 빈궁할까를 생각해본다.   


미녀와 야수의 두 주인공도 완벽하진 않다. 딴 세상에 있는 듯한 4차원 아가씨  벨과 오만하기 짝이 없어 야수가 된 왕자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 완벽하지 않아도, 흠이 있어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섞여 살 수 있어야 재미있고, 활기 있고, 다채롭고 건강한 세상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더욱 완벽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아이 먹일 것이니 더 신경 쓰게 되고, 내가 살 인생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야 할 인생이니 더 신경 써서 공부시키고 가르치게 된다. 흠과와 파지를 좋아하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으며 완벽보다는 흠이 있지만 거뜬히 극복하고, 당당히 내어 보일 수 있는 마음을 배우고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큰 지혜이고 용기임을.


사실 흠과 와 파지를 좋아하는 데는 주머니 사정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지만 이것 또한 쿨하게 인정.


애플파이, 진미채 채소전, 명란 크림 파스타 모두 맛있었다.


누가 흠과 와 파지를 쓴 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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