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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20. 2023

식은 커피, 영혼이 없어서.

진정한 소울리스좌들이 모여 있는 곳.

식은 커피를 마셨다. 나는 식은 커피를 싫어한다. 뜨거운 온기를 잃고 상온으로 내려앉은 커피는 마치 불어 터진 자장면 같기도 하고, 먹다 남은 이유식 같기도 하다. 불어 터진 자장면도 잘 먹고 먹다 남긴 이유식도 잘 먹었는데 (지금은 먹을 일이 없지만) 유독 식은 커피는 마시기가 싫다. 보통은 커피가 식기 전에 마시는 편, 뜨거운 음료를 빨리 마시는 것이 건강에 좋을 리 없지만 커피가 식을세라 부랴부랴 쫓기듯 마실 때가 있다. 그것이 싫어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도 한다. 아이스커피는 식지 않으니까. 얼음이 녹아 맹탕이 되기도 하지만 식은 커피보다는 조금 밍밍한 커피를 마시련다.


일하다 보니 커피가 식었다. 학원의 쉬는 시간은 짧다. 아니 거의 없다. 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화장실도 가야 하고, 책 준비, 교구 준비를 해야 하며 걸려오는 전화가 있으면 받아야 한다. 공강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엉덩이 붙일만하면 종이 쳐서 다음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학원 스케줄은 언제나 빡빡하다.


컴플레인 전화는 수시로 걸려온다. 학원 차량에서 있었던 친구들끼리 욕을 주고받은 모양인데 우리 아이가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서야 되겠냐는 읍소의 전화(뭐가 억울한지?), 영어학원인데 한국어를 너무 써서 물을 흐리는 아이가 있는 것 같다는 항의의 전화 (한국어는 어머님의 자제분이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만), 숙제가 많다, 적다 하는 등의 전화는 끊이지가 않는다. 특별한 매뉴얼은 없지만 대부분 전화는 친절하게, 최대한 수용적으로 받는 편이다. 전화 주시는 부모님들은 격한 감정일 때가 많으시지만 그런 전화를 일상으로 받는 학원의 교무실은 대부분 평온하다. 억울해 죽겠다는 전화에, 아이고 그러셨어요, 속상하셔서 어떻게 해요, 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전화기는 어깨에 끼워진 상태로 양손으로는 가위질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일이 많고 바쁜데 전화가 걸려오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에버랜드 아마존 익스프레스의 소울리스좌라는 아르바이트생이 한참 화제가 되었었는데 그 소울리스좌 저리 가라 하는 소울리스들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표정에 바쁜 손놀림, 말은 아이고 그러셨어요. 어머님들은 아실까, 교무실의 공기를.


그러다 보니 커피가 식었다. 식은 커피를 유독 싫어하는 이유를 문득 알겠다. 영혼이 사라진 느낌이어서 그렇게 싫었던 것 같다. 무릇 커피라면 온기를 품어야 하는 것을, 그 온기는 성의이고, 사랑이고, 눈 맞춤이고, 교감인데, 그것이 없어진 커피는 영혼 없는 수화기 너머의 전화와 같이 느껴졌던 것 아닐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식었지만 여전히 달콤한 마끼아또의 향을 품고 있다. 당충전은 되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는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녹아들거나, 긴장이 풀어지진 않는다. 식은 커피는 소울리스좌의 한 축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생활의 일정 부분을 소울리스 상태로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터에서, 집에서, 매 순간 온 맘 다해, 온 정신을 집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커피처럼, 마치 마시는 사람에게 온기와 릴랙스를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소울리스가 되면 섭섭하다. 내가 그동안 식은 커피를 싫어했던 이유, 소울리스.


식은 커피를 마시며 내일은 조금 더 영혼을 탑재하여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바쁜데, 별 것 아닌 것으로 격한 컴플레인을 걸어오시면 어쩔 수없이 내 몸은 식은 커피가 된다. 내일은 따뜻하게 온기 품은 커피로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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