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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08. 2023

희망사항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너무 거창하군요.

학원에 있다 보면 극과 극의 아이들을 볼 때가 있다. 40점 맞고 해맑은 아이, 80점 맞아서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 90점 맞은 것이 속상한 아이, 그런 아이들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귀엽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백세시대라는데 (솔직히 지구의 상황으로 보아 아이들의 세대에도 백세가 보장될지는 잘 모르겠다.) 고작 10대에 학교에서 본 내신 시험 하나로 이렇게 희비가 엇갈 일 일인가 싶어서 안쓰러운데, 해맑은 아이를 보면 해맑은 웃음에 나도 어이가 없어 웃게 되고, 눈물을 글썽이는 마음을 읽어보자니 이렇게 작은 일에 눈물까지 쏟아내는 10대의 마음, 그 뜨거운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 아이는 어땠으면 좋겠나를 생각해 보면 40점을 맞으면 차라리 해맑았으면 좋겠고, (40점 맞았으면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80점을 맞으면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속상하고 억울해서 이를 갈고 치고 올라갔으면 좋겠다. 80점은 만족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점수이다. 80점 맞으면 해맑기보다 속상해했으면 하는 것이 엄마 된 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90점을 맞고 울먹일 거면 친구들에게 들키지 말고 혼자 울먹이라는하 조언을 건네본다. 굉장히 재수 없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의 히스토리는 굉장히 다양하다. 어릴 때부터 영어 유치원부터 착실히 달려와 지금까지 쭉 잘하는 아이, 늦게 시작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일련의 성과를 보이는 아이, 늦게 시작한 데다 공부에 영 흥미도 재능도 없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틈이 벌어져 손 쓰기 어려워진 아이, 영어 유치원부터 달려왔는데도 뚜렷한 성과가 없는 아이, 정말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다른 것이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똑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본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또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이 다소 가혹하고, 난도가 높고, 한번 실패에 따라 치러야 하는 대가가 상당히 크긴 하지만, 한국에서 살 거라면, 사회가 쉬이 바뀌지 않을 테니 이런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것, 적응시켜야 하는 것이 학생인 자, 부모인 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큰 아이의 알림장 하나를 받았다. 9월 1일부터 달라지는 학교 교육, 훈육에 관한 내용인데 교사가 수업에 방해가 되는 아이를 분리 조치 할 수 있다, 근무시간 외, 지정 업무 외의 상담은 거절할 수 있다. 학생은 교사의 지도에 잘 따라야 하고 학부모도 교사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요의 내용이었다. 당연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교권과 교육의 장의 환경이 엄청 개정되고 개선되었다는 생색을 뿜뿜 뿜어내며. 당연한 것이 이제 시행이 된다는데, 정착까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 글쎄요. 그저 바라고 또 바랄 뿐이지요.


학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학교는 그냥 다니고,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 나도 생각해 보니 아이의 학교는 그냥 보내고 공부는 내가 좀 더 봐준다. 강남권의 선행학습 수준에는 택도 없지만 1학년 2학기의 수준을 넘어서는 학습을 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교사의 교육할 권리를 위해 선행학습이 금지되어 있다는데, 나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미리 어설프게 배우고 온 아이들이 정작 수업시간에 얼마나  방심하여 구멍을 뽕뽕 내며 진도만 빼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선행학습에 대한 로망이나 욕심은커녕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내 아이의 일이 되고 보니 마냥 있기에는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다. 아마 학원에서 사교육으로 빵빵 무장한 아이들을 매일 만나니 기준이 높아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집에서 오며 가며 한 장씩, 두장씩 시킨다. 아무래도 아들의 집중력은 짧다 보니 20분을 넘기지는 않는 편인데 슬슬 엉덩이 붙이고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학부모이고, 극성에 가까워 지려하는 엄마인가 보다.


사교육이 너무 친절하고 달콤해서 공교육이 설 자리가 없다는 취지의 글을 얼마 전에 쓴 적이 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다. 오늘은 사교육으로 무장한 아이들이 얼마나 서비스로서의 교육을 당연히 여기는지, 그게 아이들에게 과연 약인지 독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오전엔 한 영어 유치부에서 일한다. 8명이 정원인데 적게는 서녀명, 많아야 일고 여덟 명 되는 한 반에서 공부하는 영어 유치부의 아이들은 솔직히 지멋대로인 경우가 너무 많다. 여러 영어 유치부를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영어 유치부 전반에 대한 일반화는 아니지만, 우리 원은 도와주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고, 잘못에 대해 지적받고 혼나기보다 공감받고, 이해받고 봐주는 경우가 흔하다. 그 아이를 교육하는 엄마와 선생님들 중 누구 하나라도 제대로 된 엄한 훈육이 필요한데 공감 육아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스스로 참고 해내길 기다리기보다 얼른 도와주고 해준다. 공부면에서, 생활면에서 모두 그렇다.


가끔씩 취학 즈음에 갑자기 행동이나 태도를 교정해야겠다고 상담을 요청하시면 학원이나 아이 모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이도, 주변 친구들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그래도, 그 금쪽이 같은 모습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아이들은 더 다이내믹해진다. 선행학습으로 무장한 아이들에게 중학교 내신은 너무 쉬운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꼼꼼히 체크하는 연습, 단체 활동에 성실히 참여하는 자세 역시 인생살이에 중요한 요소라서, 다 아는 거지만 그래도 내신 준비는 열심히 시키는 편인데 자기는 다 아는 것이고, 어차피 백점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수업을 거부하거나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교육은 선택사항이고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한 부분이니 그런 것까지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오지랖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조금 더 예의 바르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거나, 내신 시험 이후의 계획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계획을 세워 미래를 준비하였으면 좋겠는데 당장 선행의 진도나 눈앞의 내신 점수에 만족하여 영어는 끝냈다고 단언하는 경우엔 조금 안타깝다. 고3까지 진도를 나갔어도, 중2 영어를 틀리기도 한다. 그러면 이건 끝낸 것이 맞을까? 영어를 어떻게 끝냈다고 할 수 있는지, 공부에 끝이 어딨는지, 이번 시험 백점이 인생에 무슨 큰 의미가 될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간다.


한 학생이 지난 기말고사에 역사 시험을 망쳤다고 툴툴거렸다. 이유를 물어보니 문제집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과관계를 차례로 물어야 되는데 결과를 먼저 지문으로 주고 원인을 물었다나, 그래서 아이들이 줄줄이 틀려 이번 시험에서는 평이한 난이도를 약속하셨다고 한다. 큰 흐름을 잡고,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사건은 중요 표시를 하여 연도를 외우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의와 앞에 나오는 원인, 뒤에 미칠 영향을 흐름으로 잡고, 관련 유적지와 유물을 그림으로 익히고 앞 시대, 뒷 시대의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여 암기하면 그것이 시험 문제에서 인과관계가 아니라 과인관계로 출제가 되었다 한들 그렇게 줄줄이 평균점수가 떨어질 일이었을까, 역사 선생님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근본을 파고들어 공부를 했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 표면적으로 훑고 요점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일어난 사달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오히려 그렇게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접해 보았으니, 아마 그 문제는 통합형 수능문제에 가까운 아주 창의적이고 좋은 문제들이었을거라고, 앞으로의 학습에 좋은 기회로 삼으라고 꼰대 같은 조언을 하고, 나 한국사 능력시험 심화 92점으로 1급 받은 능력자라고 깨알 자랑을 해 본다. 단편적인 학습, 겉만 훑는 선행에 매달리다 보니 큰 틀을 잡아 깊이 뿌리를 파헤치는 공부에 점점 흥미와 능력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요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문해력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요점 외우기, 단번에 끝내기 같은 종류의 특강이나 문제집이 오히려 장기 학습에는 악영향을 끼친다.


이제 1학년인 아이에게 공부를 어떻게 접근시켜야 할지 고민이 된다. 남들 가는 학원으로 보내자니 남들처럼 똑같이 되면 본전, 아니면 적응을 못 하고 쳐질 것 같고 그것도 안 시키지 자니 조금 불안하다. 사교육 1번지에 있다 보니 너무 보고 듣는 것이 많아져서 고민이다.



내 아이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문제집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어도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재밌게 풀어냈으면 좋겠고,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언어영역을 수월히 넘어가길 바라며 적당한 선행학습을 유지하면서 현행 시험에도 충실히, 성실히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건 뭐 변진섭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보다 더 한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는 한숨을 피식 쉰다. 노래를 들을때 김치볶음밥은 제발 네 손으로 해 먹으라고 열불을 내었는데, 나는 오히려 김치지 직접 담그는 아들을 상상하고 있으니 나부터나 잘하자,  하는 생각만 든다



아는 게 병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정말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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