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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Feb 18. 2021

새벽잠.

9년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얻은 건 수면장애다. 감정노동자로 근무하며 하루에 100건에 가까운 전화를 받고 전화를 건 사람들의 욕구를 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 었으니 어쩌면 '수면장애'만 얻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잠을 못 자겠어요.'라는 문제보다는 새벽에 깨는 횟수가 많다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개운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요즘은 백수로 지내고 있으니 잠에 대한 스트레스는 덜 한 편이지만 그래도 꼭두새벽에 깨는 것만큼 불쾌한 없다. 오늘이 딱 그랬다.


엄마는 내가 통영에 있는 동안 미리 연락을 하고 온 적이 없었다. 항상 시시 때로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오늘도 예외 없이 그런 날이었다.  거실에서 사람 기척이 들려 잠에서 깼다. 남편도 거의 동시에 깼으니 그 소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크게 들렸다.

"누가 왔나 봐."

"어머님 아니야?"

"설마... 엄마가 지금??"

정말 '설마'라는 생각으로 일어났다. 안방 창으로 해도 들지 않는 새벽이었으니 '설마 이 시간에...'라는 생각으로 거실로 나갔다. 남색 카디건을 입은 엄마가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는 엄마를 보니 화가 났다. 몇 번을 더 말해야 오기 전에 연락을 하고 올까?

"엄마..."

"일어났나. 들어가서 자..."

"왜 왔어???"

"뭐하고 있는가 싶어서"

"아니 이 시간에 왜 왔냐고.. 전화하고 오랬잖아."

"니 보러 왔다가 정초부터 남의 차를 들이박았다. 현대에서 나온 차 같든데 앞에 쥐박은 거는 얼마씩 달라카긋노?"

"어??? 남의 차를 박았다고??"

"그래. 요와서 봐봐라 저게 밑에 엄마 차 옆에" 거실 창에서 내려다본 주차장엔 엄마가 3주 전에 새로 산 흰색 코란도가 보였고 그 옆에 은색의 산타페가 서있었다.

"은색 산타페??? 저거 박았나?"

"그래. 아이고 느그가 준 용돈으로 그 차 수리비 내게 생긴네. 그 사람이 8시에 나간다 카든데 그때까지 요 앉아 있다가. 내려가서 한 번 더 사과를 해야지. 한 번 더 사과하면 도색만 한다고 하겠나??"

"참... 저 사람이 앞 범퍼 다 갈아 달라카면 다 갈아줘야지. 여기 주차하기도 힘든데 만다꼬 차도 많은 시간에 와서 사고를 냈노."

"속상해 죽긋네 고마..."

엄마는 정말 속상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티브이를 보며 '들어가서 자라~ 엄마 요 앉아서 티브이 좀만 보고 갈끼다.'라고 말한다. 내가 티브이 볼륨을 낮추고 들어 가려고 일어서는데 '티브이 소리를 누가 끄노.'라며 티브이 볼륨을 올렸다. 엄마 옆에 앉아'도대체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혼잣말을 하 분을 삼킨다.


"엄마, 그래서 언제 갈건데???"

"응~ 이거 드라마 3편 다보면 갈낀데." <비밀의 남자 후속으로 방영 중인 드라마가 연속 3편 재방송 중이었다.>

"본거 아니가??"

"응 봐도 재밌네."

"...."

엄마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남동생이 이번 설에 사준 원피스 자랑을 하다 8시에 내려가서 피해차량 주인과 이야기를 했고 다시 올라와서 드라마 3편을 모두 보고 돌아갔다.

남편은 '어머님이 왜 오신 건지. 이해가 안된다.'라고 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장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며 괜히 도어록에 화풀이를 했다.

효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에게 잘하는 딸이 돼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 또 속에서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불쾌한 경험을 하고 나니 잘하는 딸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숲의 맑은 공기로 오늘의 불쾌함 기분을 씻으리라 다짐하며 통영에 새로 생긴 미우지 명품숲이라는 산책길을 걷는다. 걷고 있는데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다음주에 볼까?"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기분이 별로라... 내가 엄마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가족이랑 재밌는 시간 보내."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만큼 가족애가 없는 집도 없는 것 같다. 유일하게 모든 가족이 모이는 때가 아빠 제사 때인데 그조차도 제사가 끝나면 모두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다. 만약 나의 엄마가 혼자서 잘 지내지 못하는 소녀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었다면 누구 하나는 옆에 남아 엄마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줘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엄마는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라 혼자서 여행도 잘 다니고 친구도 사귀며 누구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고 계신다. 그렇다 보니 자식이 옆에 오래 붙어 있는걸 불편해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엄마 집에서 며칠 머물다 가려고 해도 "니는 느그집 안가나?"라며 빨리 집에 가라며 재촉한다.


완벽히 혼자의 인생을 즐기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래, 우리 엄마 같은 사람도 없을 거야. 내가 잘해야지...'라는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한다. 달아난 새벽잠처럼 내가 엄마에게 가졌던 좋지 않았던 감정도 저 멀리 달아났다. 참 모녀 사이가 아이러니한 건지 부모와 자녀 사이가 아이러니한 건지 모를 일이다. '제발 오기 전엔 통보를 해달라'는 내용을 포함한 장문의 문자를 엄마에게 보냈다. '가족끼리 무슨 벨을 누르고 노크를 하노.'라는 엄마. 내가 통영에 있는 동안 불쾌한 방문은 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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