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예민한 시기가 시작됐다. 뒤척 뒤척 그러다 잠 못 드는 밤 결국 어제 자정을 놓치고 오늘 새벽에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자동으로 열리는 커튼 덕에 또 원치 않는 기상.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내가 잠들었을 때 일어났던 새로운 소식 거리가 없는지 웹사이트를 열었다.
초록창 오른쪽 하단 쇼핑몰 제품 광고가 떠있다.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 눈길이 멈춘다. "엄마가 완전 감동" 엄마가 감동하니 세일할 때 많이 사주라는 것 같은 문구와 분홍색 바스켓에 담긴 지구 젤리 같은 동글동글 한 것이 놓여 있다. '와, 엄마가 지구 젤리도 좋아하는 건가?'라며 무심코 열었다.
열고 보니 세재다. 가정의 달을 맞아 고객들에게 빅세일 중이란다. '아, 엄마의 감동 포인트가 고작 세재라니.' 왠지 모를 허탈감과 함께 젠더 감성이 욱 하고 올라온다. 앞에 있던 남편에게 "오빠, 엄마가 완전 감동...'이라며 광고 문구를 읽어 주고 이게 어떤 제품의 홍보인 것 같냐고 물었다. "몰라."라고 건성으로 답한다. 한껏 예민한 날 젠더 지수도 수직상승 중인데 '몰라'라니, "세재래."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도통 분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나의 엄마가 저깟 향기 좋은 세재에 감동을 한다고?'라는 생각이 든다. 여장부 스타일인 엄마는 혼자 사는 집 거실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맥심을 마시는 사람이다. 20대 중반엔 그런 엄마를 보고 '파리지앵'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안경도 땡그란 알에 밤색의 그러데이션 유리가 들어간 범상치 않은 종류였다. 패션에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엄마는 절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가끔 만나는 이모들이 '야야 나이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라고 말하면 "나 좋으면 됐지 보는 사람 좋으라고 입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성 의 구분 없이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는 시대를 거치며 남녀를 보는 판에 박힌 시각은 사라지고 있다. 80년대생인 나도 커 오는 동안 '넌 여자니깐 이래야지"같은 말을 부모로부터 듣고 자라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결코 분홍색 옷을 사준 적도 없었다.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 노란색과 초록색이 교차된 줄무늬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를 상당히 많이 입고 있는데 내가 "내 옷은 이것밖에 없었어?"라고 물었더니 '그냥 네가 그 옷을 좋아했어.'라는 대답을 들었다. 하긴 엄마는 내가 짧은 커트 헤어에 화동 드레스를 입고 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고 입혀 보냈던 분이다. (그래서 한동안 은따를 당하긴 했다.)
아빠는 크리스마스 때면 선물로 '낱말카드'를 주로 사줬는데 딱 한번 인형을 사준적이 있었다. 여성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북치는 토끼 인형'이었다. 그때 엄마는 레고를 사줬었다. 아빠가 토끼 인형을 사줬던 이유는 당시 유행이기도 했고 내가 토끼띠라는 단순한 이유였고 엄마가 레고를 사줬던 이유는 동생들까지 같이 가지고 놀 수 있었어 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남. 녀 차별을 겪지 않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들없는 집의 둘째딸이었던 난 수시로 "네가 고추 여야했는데."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 누구보다 성인지 감수성에 예민했다. 부모에게서 듣지 못했던 "여자가 저래서야 쯧쯧쯧", 혹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먹어"같은 말을 주변에서 들을 때면 어린 마음에도 어떤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의 부모는 옆에서 "아 니깐 저라지요.", "한창 클 때니깐 많이 묵어야지요."라며 웃었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저래야 해 와 같은 흑백논리로 성역할을 나누는 시대는 분명 지났으며 남, 녀가 아닌 '선호하는 것',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곳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테스트받고 있으며 특정 성을 연상케 하는 광고 문구를 보며 의아한 감정을 숨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부턴가 개인의 성취향이 남성과 여성 두 가지에 양성이 추가됐다.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성적으로 끌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양성' 우리는 지금 남과 여로 정의될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새로운 시대에 뜬금없이 엄마를 감동시키는 수단이 세재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세재 광고 카피처럼 분홍색 바스켓에 담긴 세재를 많이 사서 '엄마 감사해요.'라며 선물하면 "엄마는 빨래만 하다 죽으라는 거냐?"며 어이없어할게 뻔하다. 흡연가인 엄마를 감동시키기 위해선 차라리 담배 선물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70년대 후반, 남자가 앞치마를 입고 등장해 '일요일은 아빠가 세탁하는 날.'이라는 세탁기 광고는 꽤나 유명하다. 2021년 세월에 역행하는 '엄마가 완전 감동..'으로 시작하는 광고를 만든 카피라이터에게 문득 궁금해진다.
"정말 당신 엄마를 완전 감동시킬만한 게 분홍색 바스켓에 담긴 세재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