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하구 | 다대포 해수욕장
작년 꼭 이맘때 즈음 부산으로 2박 3일간의 여름휴가를 떠났을 때다. 그때의 나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힘에 부쳐 짧게나마 휴직을 택했고 두 달이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을 쉬며 날이 갈수록 상실하는 인류애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 겨우 복직했고, 그 후 8개월가량이 지난 시점이었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은지 오래였다.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얽혔고, 버티다 못해 다른 부서나 계열사로의 발령을 요구했던 때였다.
주말을 포함해 9일, 광복절을 포함해 10일간의 휴가 중 하루였다. 이날 오전은 무척이나 비가 많이 왔다. 아침 식사를 위해 잠시 나갔다 온 것을 제외하고는 숙소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숙소에 비치된 스마트 TV로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있는 와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OO님, 발령낼 곳을 찾았어요. 발령 나는 곳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를 수 없는 거 아시죠?"
팀장의 전화였다. 팀장이 전하는 소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팀장은 내게 해(-)가 될 여러 소식을 함께 전했다. 여태 내가 안간힘을 쓰며 버텼던 모든 순간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가슴 한편이 저릿해지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 안으로 열기가 차올랐다. 당시 팀장과 팀장을 통해 얘기를 전해 들은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게 퇴사를 권유할 정도였을 정도로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었던 1년 하고도 8개월의 시간이었다. 이 잃어버린 세월의 중간중간 다른 계열사의 여러 팀들이 그렇게 데리고 있을 거면 자신들의 팀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정식으로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을 했던 팀장이었다.
직접 보지도, 듣지도, 겪지도 않은 일에 뼈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두툼한 살을 붙여 깃털처럼 가벼운 입을 놀려 나라는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고서야 그는 드디어 나를 놓아주었다. (보직 변경 발령이 난 현재 팀의 팀장님은 직접 겪어보니 '그'의 말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며, '그'의 말만 듣고 선입견을 가져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를 했다.)
1시간 가까이 붙들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통화 종료음이 들리자마자 그 해 가장 크게 울었다. 갱생이 불가한 쓰레기가 된 사실도 물론 화가 났지만, 내 직업에 프라이드를 가지며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울인 내 노력도, 여러 명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인원을 채워주지 않아 6~7명의 일을 혼자 했던 지난날들도, 이곳에서 보낸 10년 가까운 세월도 모두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곤히 잠들어있던 연인은 나의 우는 소리에 깨고서는 바다를 보러 가자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이제 그에게서 벗어난다는 기대가 밀려왔다. 바다 가득 피어있던 해무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손 틈새로만 보이던 세상이 이제야 가림막을 치워 막힘없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는 시간대가 되었고, 시동을 걸어 석양을 보러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갔다. 새 삶을 맞이할 기대감과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혼란한 마음이 혼재된 그날의 내 마음처럼 하늘빛은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답게 물든 하늘빛이, 바닷물에 비치는 저물어가는 태양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뻗어가는 파도가, 드넓은 백사장 위로 붉게 내려앉은 노을이, 대신하여 근심을 싣고 떠나 주는 구름이, 스러지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따뜻한 연인의 눈빛이, 연인의 손길이, 연인의 목소리가 새로운 삶을 맞이할 나를 위로해주었다.
살아오며 봐 온 수많은 바닷가의 일몰 중 이날만큼 차분하게 나를 위로해 준 일몰은 없었다. 이날의 일몰 사진은 다시금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사진이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과도한 부담으로,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그냥 생애 자체의 힘듦으로 지쳐갈 때마다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눌러 이 사진을 본다. 흘러가는 파도에 고통을 흘려보내고 보다 나은 1초 뒤, 1분 뒤, 1시간 뒤, 다음 날을 맞이하기 위해.
아, 부산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