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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Nov 29. 2023

담배 묘기

      

  간사하다면 간사하게도,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자면 당장 남극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상상이 튀어나오곤 했다. 내 몸을 얼음에 벅벅 문질러도 끄떡없을 것만 같고, 그걸 애써 견디는 게 아니라 기꺼이 즐길 수 있을 것만 같고. 막상 겨울이 되어 한파가 들이닥치면 불덩이를 상상했다. 물론 여름이 얼마나 고됐는지는 기억하니까 용암 같은 데다 몸을 문지르는 상상까진 하지 않는다. 대신 사우나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고는 생각한다. 사우나에서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해하면서.

  아저씨가 꺼낸 라이터를 보며 저걸로 발가락 끝을 지져보면 어떨까, 생각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눈조차 내리지 않는 심심한 겨울이었고, 나는 콧구멍에 겨우 걸쳐 넘칠락 말락 하는 콧물을 의식하며 연신 훌쩍였다. 아저씨가 먼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아빠도 마지못해 담배를 꺼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아저씨는 나와 초면이었고 대머리였는데, 진즉에 탈모였거나 민머리를 하고 다니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머리를 만졌고, 다시금 만졌고, 나중에는 내게도 ‘만져 볼래?’ 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 그의 행동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생전 처음으로 만져 본 대머리의 감촉은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 꽁꽁 언 손의 감각이 무뎠다. 대신 그가 내 손의 차가움을 걱정했던 순간은 기억한다. 그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내 손에 둘둘 감아 준 것이다. 아저씨의 체온으로 인해 손이 약간은 녹아드는 듯했다. 돌이켜보니 나 대신 아저씨를 걱정하던 아빠의 모습도 선명히 남아 있다. 꽤 서운했던 모양이다. 벌거벗어도 별문제 없지 않느냐며 아저씨가 대답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 모습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아저씨는 너무 추워 보였고, 심지어 목도리도 없이 목까지 휑 드러나니 아주 창백했다. 앙상한 눈사람과 같이.

  첫 번째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버린 아저씨는 바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대신 바로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허, 참…… 아저씨는 그런 탄식만 내뱉고서는 아빠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빠는 바로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이 아저씨 담배 묘기 잘한다? 보여달라고 해 봐.”

  바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아빠가 말하자, 입에 물린 담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내가 기대를 품고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도 두어 번 아빠를 흘끔거리다가 담배를 물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던 그는 입술을 모은 채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옹졸하게 모인 입술에서 작은 도넛 모양의 연기가 톡톡 튀어나왔다. 난 그때 꽁꽁 얼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춘 채 집중했다고 했다. 아마 아저씨의 다음 묘기는 입에서 내뿜은 연기를 코로 다시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신나서, 묘기도 놀라웠지만 두 어른이 묘하게 즐거워하는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해서, 그게 대체 뭐냐고, 무슨 묘기냐고 손뼉을 치며 물었다.

  “이거? 이건 거북선이라고 하는 건데…… 야, 애한테 이걸 어떡하니?”

  “왜 그게 거북선인데요?”

  “어이, 나 못된 아저씨 되겠잖냐.”

  아저씨는 대답 대신 도넛 두 개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치 ‘쉿!’하는 모양새로 손가락으로 입술 정중앙을 가린 채, 벌어진 좌우의 입술 틈새로 동시에 작은 도넛이 톡톡톡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아서 입술 좌우로 연기가 비실비실 흘러나왔는데, 그런 아저씨의 모습이 조금 바보 같아서, 나는 바보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빠와 아저씨가 웃었다. 아저씨는 웃음이 터진 아빠를 바라보며 아니, 이게 간만에, 몇 년 만에 하는 건데, 임마, 하고 중얼중얼대며 바로 새 담배를 꺼내 신중한 얼굴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멋지게 해냈다.     

  

  마지막 묘기 하나만 보고 들어가자던 아저씨는 묘기를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작은 도넛을 만들 때보다 덜 옹졸하게 모은 입술에서 뱉은 연기의 좌우를 양손으로 밀어내는 식이었는데, 뭐가 묘기라는 건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연기는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오랜만이라 잘 못한 것이기도 했겠으나, 난데없는 겨울바람이 우리 사이에 껴들어 연기를 흐트러뜨리며 지나간 탓이 컸다. 추위에 코와 볼과 손가락 무엇보다 민머리가 벌겋게 변했지만, 정작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연기는 계속해서 산산이 흩어졌다. 아저씨는 바람이 불지 않는 순간을 기다리며 연기를 내뿜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마다 바람이 껴들었다. 슬슬 나는 묘기가 궁금하지 않았고 지루해져서 들어가고만 싶었다. 뭔가 집중이라도 하고 있던 아저씨와 달리, 나는 가만히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 있음에 불과했고,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코를 훌쩍이고 약간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뭔가 말을 꺼내긴 어려웠다. 너무 몰두한 아저씨를 방해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빠가 점퍼의 지퍼를 내린 건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손까지 뺀 아빠는 아저씨 옆으로 다가가서는 점퍼를 양옆으로 펼쳤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보인 행동이었기에 나도 따라서 점퍼를 펼친 채 아저씨 옆으로 향했다. 아저씨는 우리, 혹은 점퍼에 둘러싸인 채 쪼그려앉은 자세로 연기를 조심스레 내뿜었다. 또 마법처럼 날아든 바람이 끼어들려 했다. 아빠는 허리를 숙여 아예 아저씨를 점퍼로 덮다시피 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었다. 연기는 흩어지지 않았고, 아저씨가 연기의 좌우로 손을 천천히 뻗어내자 연기는 뱅글뱅글 돌면서 이제껏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도넛 모양이 되었다. 아저씨는 신중히, 그러나 다급하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뒤이어 내뱉은 연기는 거대한 도넛 정중앙으로 향했다. 도넛 모양 연기의 회전에 휘말린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졌다. 아빠와 내가 점퍼를 펼쳐 만든 공간 안에서, 하얀 해파리가 날아다녔다.

  그건 대단하다면 대단했지만, 누구도 감탄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날아다니는 해파리를 바라보았다. 해파리는 아빠의 바지와 충돌하며 산산이 흩어졌다. 연기가 완전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모두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 추위를 견딜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몸을 떨며 점퍼를 여몄다.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아저씨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어쩌다 그의 목도리는 내 목에 감긴 채 집까지 따라왔는지에 관한 기억은 없다. 그는 초면인 아저씨에 불과했다. 다만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지 않는 여러 이유에서 그 아저씨를 떠올릴 때가 있다. 어느 겨울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담배를 피우는 엉뚱한 기분을 만끽해 보곤 한다. 그때 역시 아저씨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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