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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Nov 29. 2023

얼굴을 되찾은 사람

  그는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이목구비가 손상되었다거나 화상 따위의 영구적인 피해가 남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명성에 기대심을 안고 그를 찾아온 이들 중 대다수는 크게 실망했다. 심지어 비난까지 퍼붓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의 얼굴은 멀쩡했다. 다만 저 인상 어두운 이가 잃어버린 건 자신감과 같은 심리적 건강 기능에 불과할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다. 과도한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바라보길 수십 회는 시도했다. 하지만 얼굴의 모든 부위가 직소 퍼즐처럼 나뉘면서 저마다 개별의 상으로 번쩍번쩍 변할 뿐이었다. 거울에서 물러선 그는 괴로움에 빠진 채 눈을 감고서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던지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칠흑의 수면 위로 소금쟁이의 무리가 움직였다. 소금쟁이들은 어떤 모양을 그리듯 모이다 이내 흩어졌다. 작고 가벼운 곤충의 발길질이 남긴 물주름이 울렁대며 미완성의 모양을 완전히 지웠다. 

사진을 찾아보기 위해 클라우드 저장소를 열었지만 애당초 그는 자기 얼굴을 기록하지 않았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이 순간만큼 그가 안정을 취할 때도 없다). 구도와 조명, 색감 중 무엇 하나도 유념하지 않은 음식과 풍경, 거기다 촬영자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의미불명의 확대 사진과 손가락으로 렌즈를 가려서 용량을 잡아먹는 쓰레기 파일들만 거기 있었다. 

  그는 주저하며 탁상시계와 달력 정도나 겨우 둠으로써 민망하게나마 기능하는 책장의 가장 윗부분으로 손을 뻗었다. 네모나게 구획된 칸이 아닌 그야말로 맨 꼭대기의 그곳에서는 언제나 쌓인 먼지가 너풀대고 있었다. 거기서 졸업앨범 하나를 꺼낸 그는 표면의 먼지를 털어내고서는(그러나 손바닥과 앨범 표면에는 여전히 묵은 먼지가 달라붙었고 털어낸 먼지의 일부마저 그의 호흡기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에 털어냈다고 말하긴 애매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의 자신을 찾아내 보았다. 몇 반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1반부터 내내 뒤적이는 동안 많은 얼굴들을 보았다. 옛 얼굴들을 보니 되살아나는 일화도 있었다. 이윽고 그는 5반의 사진들을 바라보다 그곳이 자신의 반이었음을 확신했다. 누구보다 담임의 얼굴과 이름이 선명했다. 페이지를 넘겨 까마득하게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촬영 분위기에 호응하지 못하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구겨진다거나 흐려지는 일은 없었지만 내내 낯설어서, 자신이라는 근거는 이름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잃어버린 건 자기혐오 탓이었다.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 감정은 아니었다. 단순하거나 시시하게도, 그의 얼굴이 어떤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그 얼굴이 얼마나 못생겼고 그에 따른 어떤 일화가 있는지를 열거할 필요는 없다. 누구라도 무심결에 평가하게끔 만드는 외모였다는 설명이면 충분할 듯하다. 하여간 그는 자기 외모가 슬펐고 그걸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잃어버리기 전에도 스스로를 인식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했는데, 사춘기를 겪는 시기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쭉 사진 찍는 행위를 기피했던 게 증상에 조금이나마 일조한 모양이었다. 주민등록증이나 학생증, 병사정보 시스템 따위와 같은 공문서용 사진 이외에는 독사진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는 몇 장의 사진마저 여럿이 형성한 기념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여 쭈뼛쭈뼛 찍은 것에 불과했다.

  훗날 얼굴을 잃어버린 그에게 정신과 전문의가 그림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림이란 그 자신의 초상화였는데, 짐작과 달리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도 없이 펜을 들어 제 얼굴을 그렸다. 격정적으로 휘갈기는 손짓은 묘하게 능숙했는데, 전문의는 그에게 열댓 번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서야 어째서 그 손짓이 능숙한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얼굴 자체는 정확하게 그리지 못했다. 그 열댓 개의 그림 간에는 지적할 만한 차이점으로 가득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그림 같지도 않았고 같은 사람을 그린 그림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열댓 개의 그림은 ‘그’라는 사람의 초상화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게끔 했다. 거기엔 턱과 광대, 이마와 같은 얼굴 골격과 피부, 입꼬리와 눈매 등등 그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특정 부분들의 화풍이 놀라우리만치 일치해 있었다. 그는 자기 얼굴은 알지 못했으나, 얼굴의 못난 부분만큼은 아주 분명하게 기억했다. 오히려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일 정도였다.    


 

  못생겼다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못생겼을 뿐인 그가 이렇게 주목받은 계기는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인적 드문 밤거리에서 살벌한 소리와 함께 트럭과 승용차 한 대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찌나 인적이 드문 거리인지, 우울감에 불면까지 시달리게 된 그가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잠들기 위해 야밤에 뜀박질을 하면서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게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마침 뜀박질을 하던 그 앞에 승용차가 나타났고, 시간이 멈춘 게 아니었군, 생각하는 순간 그 충돌사고가 벌어진 것이었다. 사고에 비해 경미한 부상을 입은 승용차 운전자는 찌그러진 차에서 기어 나와서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절대로 잊지 못할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로 손짓했다. 그는 유일한 교통사고 목격자로서 성심성의껏 진술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사고에 대해서는 충실히 대답했지만, 블랙박스와 CCTV 영상을 마주할 때만큼은 엉뚱한 대답만을 내놓았다. 그의 증언은 영상 속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어그러져서, 이내 자신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게 못된 짓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부러 멀쩡한 팔다리에 깁스까지 꽁꽁 매었던 승용차 운전자는 견디다 못해 깁스한 팔다리를 휘둘러 그를 두들겨 패고야 말았다. 이후에는 꾀병이 아닌 진실된 마음의 병을 얻은 운전자는 시름시름 앓다 의식까지 잃게 되었다.

  일이 잘 굴러가나 싶더니 크게 꼬이기 시작했음을 감지한 승용차 운전자의 가족들은 크나큰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한 미스터리 전문 TV 프로그램에 이러한 사태를 제보한 것은, 충격에 의한 후유증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검사 결과를 받은 직후였다. 승용차 운전자가 잠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우연히 삼교대로 곁을 지키던 아들이 용변을 보려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운전자 역시 때마침 자신과 눈이 마주친 간호사를 바라보며 멍하니 상황을 판단하고자 애썼지만, 못생긴 남자의 엉망진창이던 증언을 떠올리다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혈압만 올라 다시 의식을 잃고야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경찰을 방불케 하는 투철한 수사 노하우를 지닌 TV 프로그램 제작진들에 의해 밝혀졌다. 트럭 기사와 승용차 운전자는 약간의 과잉 진료를 거친 진단서를 근거로 한 합의금을 주고받았다. 그가 공식적으로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는 촬영팀이 들이대는 카메라 앞에서 얼굴의 절반을 잃었고, 이후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머지 절반마저 잃어버렸다. 

  나름의 전통을 지닌 TV 프로그램은 온갖 전문가와의 연결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 전문가들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오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는 범죄자도 아니었고 피해자도(운전자의 폭행 사건을 뺀다면) 아니었다. 즉 마음껏 헤집기 좋은 연구 대상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자신의 증세가 호전되기를 바라던 그였으나, 전문가들은 너무 환한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얼굴을 향한 인식은 빛을 피해 더욱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곧 전문가들에게 그는 광신적 사이비 신도 혹은 민간요법 맹신자 따위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그즈음에는 그마저 스스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도 그는 ‘이제 그만할래요’ 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겐 오직 괴로움뿐이었고, 그것만이 응당하게 그에게 허락된 감정이었다. 그는 괴로움에 미쳐버릴 듯하면서도 그 티끌만 한 괴로움을 붙들었을 때만 이따금 자신을 유지하는 행세라도 해낼 수 있었다.   


  

  이제 거울을 전부 치워버린 작은 원룸에서 자력으로는 나올 수 없게 된 그를 방문한 것은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어느 과학자였다. 과학자는 작은 기계를 세 대 가져와 원룸 내부에 이리저리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차를 타고 가던 중, 눈을 가리던 안대가 벗겨지며 백미러 속 자신을 바라보다 졸도한 전적이 생긴 그를 위한 과학자의 배려라고 했다. 실은 과학자가 배려한 것은 아니었고 기계 자체가 그만한 크기였기에 해볼 만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바닥에 앉았다. 기계는 그의 책상 혹은 책장과 싱크대에 놓였다. 그건 그의 좌우 그리고 정면이었다. 과학자는 어딜 바라보든 상관없으니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좋다며 달래듯 말했다. 그는 익숙한 원룸 내부에 놓인 낯선 기계에 잠시 눈길을 보냈다. 기계는 기계다운 소리를 내며 움직여서는 똬리를 튼 뱀이 몸을 일으키듯이 긴 관절부를 흐느적대며 세웠다. 안쪽으로 접혀 있던 관절부가 움직이면서 렌즈가 나타났다. 그게 일종의 카메라임을 그는 알아챘다. 과학자는 산책이나 하겠다며 그를 두고 나가 버렸다. 만약을 대비한 조수가 있기는 했지만 화장실에 숨은 채였다.

  세 대의 작은 렌즈가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수직으로 숙였다. 거기에는 볼펜이 부착된 또 다른 기계 관절이 있었다. 기계 소리와 함께 펜이 종이 위에서 끼적댔다. 렌즈는 수시로 시선을 들고 내렸다. 그림이 잘 그려지는지 감시하는 눈치였다. 가끔은 그가 고개를 크게 돌리거나 하품, 기침 따위를 하면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불만 가득히 노려보는 듯해서 그는 겁에 질린 채 가장 오래 바라보던 곳으로 눈길을 보내려 애썼다. 그럼 렌즈는 수차례 갸웃대다가 다시 종이를 바라보았다. 펜은 그제야 슥삭슥삭 움직였다.

  기계의 그림 솜씨는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는 기계가 무엇을 그리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바닥에 앉은 탓에 기계 관절의 그림이 그려지는 종이를 볼 눈높이가 안 된 것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그림이 완성되는 데 걸린 시간에 있었다. 그는 처음 오 분가량 바라보던 싱크대 위 선반에 뒤집어 둔 머그잔에 시선을 고정하려 애쓰는 데 집중했는데, 만일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지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진즉에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종이에는 그의 고개가 움직여질 때마다 새로이 얼굴, 그러니까 타원형 동그라미가 서너 획이나 써서 엉성하게 그려졌고, 눈코입의 위치를 잡기 위한 십자선이 동그라미마다 새로 그어졌다. 물론 이 십자선 역시 삐뚤빼뚤함은 물론이었다.

  그는 물론이고 많은 전문가는 종종 과학자가 어쩌다 그에게 자신의 인공지능 초상화 기계를 시험하러 갔는지 놀라워한다. 그 기계는 인공지능이라 부르기에는 꽤 뒤처진 기술력의 구성물에 불과했다. 지금에야 모 예술가와 협업의 성공으로 테크노아트 분야에 눌러앉은 모양새지만, 그 시기 과학자는 자신의 인공지능 연구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본래 과학자의 목적은 물체의 외형을 보고 설계도를 그리는 휴대용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과학자의 뒤처진 기술력만큼 기계의 그림 그리는 속도는 저만치에서 기어다녔다.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기 위해 다짜고짜 이력서 먼저 넣어보는 심정으로 그를 만났던 것에 불과했다. 과학자가 산책을 나간 것도 기계가 느릿느릿 얼굴을 그리는 과정을 차마 가만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과학자의 산책이란 원룸 건물을 하염없이 빙빙 도는 걸 뜻했다. 서른 바퀴쯤 돌고 어떻게든 기계의 느린 그림이 완성되고도 남았을 무렵에 과학자는 원룸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과학자가 마주한 것은 익히 알려진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의 텅 빈 시선이 아니었다. 그는 돌아온 과학자를 향해 기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있는 것 같다고, 와서 봐 달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손짓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는 세 대의 기계가 각각 좌우와 정면에서 그린 초상화를 가져와 번갈아보며 극도의 흥분에 빠진 모습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함을 넘어 거부반응까지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그에게 일어날 리 없는 반응이었다. 그림은 아주 지저분한 선들의 집합이었다. 집중을 흩트리고 본다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무수한 십자선과 얼굴을 그리기 위한 동그라미들. 마구잡이로 색칠 놀이라도 한 게 아닌지 싶은 머리카락 표현…… 그려진 시간보다, 산책의 시간보다 오래 그림을 바라보던 둘은, 뒤이어 달라붙은 조수까지 셋은, 그 세 장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과학자와 조수는 사실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몰두하는 척하느라 애썼다. 그는 시무룩해져서는 종이를 한데 겹쳐 모아 바닥에 툭툭 치며 정리했다. 과학자와 조수 역시 울적한 마음으로 그가 겹쳐둔 종이 세 장을 집어서 챙기려 했다. 

  종이를 잡아당기는 힘에 과학자가 아래쪽을 내려다본 것은 그때였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던 그가 놀란 얼굴을 하고서는 종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곧 얼굴을 종이에 가까이 들이대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과학자에게도 뭔가가 보였다. 종이가 형광등 빛을 내리쬐자, 세 개의 그림이 하나로 겹쳐 있었다.

  기계의 형편없는 솜씨로 인해 겹친 그림은 얼굴(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타원형 동그라미) 전체가 벅벅 그어진 모습이었다. 다만 어쨌든 세 대의 기계가 그렸던 눈코입은 존재했고, 그뿐 아니라 턱이나 광대, 이마 따위의 골격 역시 엉성하게나마 표현이 돼 있었고, 그것들이 겹치며 미세한 음영으로 쌓였다고는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고,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 있다고 느꼈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붙였던 청테이프를 뜯어낸 그는 덕지덕지 남은 접착제들 사이에서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는 거울 속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어째서 그 그림으로 인해 그는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도 있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가 남긴 나름의 설명 이후로 누구도 나서서 말을 얹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저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그림에 그의 전부가 담겨 있던 겁니다. 단순히 하나의 관점에서는 볼 수 없던 삼차원이 여러 시선을 통해 채워진 셈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 설명이 엉터리임을 알기 어렵지 않다는 것과 별개로, 과학자는 이후 으쓱할 만한 수의 예술가들과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과학자는 신세를 폈다.

  그 겹친 그림에서 정확한 얼굴형을 찾아낸 이는 아무도 없다. 그만이 거기서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면 그는 정말로 그 새까만 초상화를 바라보며 으쓱했다가, 또 분노하거나 슬퍼하다가도, 이내 넋을 놓아버리기까지 했으니까. 심지어 입을 맞출 기세로 얼굴을 그림에 가까이 들이댄 적도 있었다. 언젠가 쉬어가는 방영 회차에 쓰려는 목적으로, 미스터리 전문 TV 프로그램 촬영팀이 최소한의 인원만 꾸려 그의 원룸을 방문했던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별다른 수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카메라맨 혼자서만 그의 원룸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좁은 방이었기에 좋은 구도가 나오지 않았다. 카메라맨은 그가 그림에 얼굴을 들이대는 순간, 형광등에 의한 그림자가 그림의 일부와 정확히 일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카메라맨은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그와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림은 이전까지와 같이 지저분하게 칠해지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새까만 타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카메라에 촬영되었을까 싶어 테이프를 돌려 보았지만, 볼 수 있는 건 비좁은 방에서 온 몸을 덜덜 떨며 겨우 찍었던 그의 뒷모습, 그림자와 그림까지 가린 그 뒤통수가 전부였다.





모 전시에서 '페트릭 트레셋'의 관객참여 전시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로봇에게 그림을 받은 경험을 응용하여 쓴 소설입니다. 이날 아쉽게도 로봇 하나는 작동에 문제가 있었다네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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