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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Nov 15. 2023

[단편소설] 순례(5)

  새로운 등산객이 중턱에 나타난다. 모자를 쓴 이와 나 사이에 가만히 선다. 그 뒤로 두 사람 더 있다. 모두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인다. 서로 일행은 아닌 듯하다. 다들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보온병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물을 컵에 따라 마시는 등산객이 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이 주위로 한 번씩 내밀어진다. 마시고 남은 물을 바닥에 흩뿌린다. 컵은 내게도 다가온다. 조금씩 삼킨다. 숨을 내쉬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김이 뿜어져 나온다. 다 마신 컵을 돌려준다. 모자를 눌러쓴 이에게도 컵은 내밀어진다. 손을 저으며 뒤돌아 일어나려 한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관절이 굳었는지 느린 움직임이다. 결국 앞으로 고꾸라진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돌멩이가 바위 위를 구르며 하찮은 소리를 낸다. 눌러쓴 모자가 벗겨진다. 손을 뻗은 곳은 돌탑 위다. 바람이 벗겨진 모자를 돌멩이들 위로 잡아끈다. 나는 옆을 지나던 모자를 잡는다. 겨우 일어나 내게 모자를 건네받은 그이는 자신이 무너뜨린 돌탑을 본다. 눈 주변이 벌겋게 부어 있다. 돌탑은 연달아 무너진다. 작은 돌멩이가 데굴데굴 구르는 게 웃음소리 같다.

  그 사람은 다시 모자를 눌러쓰며 쪼그려 앉는다.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멀쩡한 돌탑과 무너진 돌탑이 얽혀 있어서 건들면 건들수록 망가진다. 어쩔 줄 모르면서 어쨌든 움직이는 손이 있다. 보온병을 배낭에 집어넣고 온 등산객이 돕는다. 따뜻한 물을 얻어 마셨던 나머지도 다가온다. 그들이 손을 놀릴수록 우르르 좌르르 소리가 난다. 누구의 실수인지 작고 둥근 돌멩이 하나가 낭떠러지로 구른다. 붙잡으려는 손들을 지난다. 거친 표면에 튕겨진다. 그들은 자신이 놓친 작은 돌멩이를 간절히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다시 치솟을 때 낚아채는 건 나다. 그것을 쥔 채로 그들 사이에 앉는다. 손들이 가냘픈 벌레처럼 돌멩이 위를 걷는다. 대화를 하듯 손끼리 닿는다. 하나같이 차게 굳은, 빳빳한 손.

  누군가 훌쩍인다. 모자를 눌러쓴 이를 바라본다. 마주 보게 된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던 서로를 본다. 소리가 나는 건 이쪽이 아니다. 고개 숙인, 등산객이라 여겼던 이들 중 하나다. 조금씩 터져 나온다. 훌쩍임이 옮는다. 눈물이 옮는다. 등산객 모두가, 모자를 쓴 사람까지 운다. 나는 울지 않으려 애쓴다. 어쩔 수 없이 훌쩍인다. 숨을 입으로 내쉴 수밖에 없다. 돌멩이를 집는다. 다른 돌멩이를 밀어 공간을 마련한다. 돌멩이를 바닥에 놓는다. 돌멩이 옆에 돌멩이를 놓는다. 그렇게 깔린 돌멩이 위에 돌멩이를 얹는다. 다시 돌멩이를 얹는다. 무너지기 이전의, 소원을 빌며 아슬아슬 균형을 맞춰 놓았던 모양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소원을 빌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층층이 좁아지는 단단한 형태의 돌탑이 하나둘 세워진다. 그의 돌탑에 대해 생각한다. 흩어진 소원을 한곳에 모은다. 멀쩡히 복구될 돌탑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와중에도 손이, 혹은 무릎이나 발끝이, 팔꿈치가 쳐서 무너뜨리는 돌탑이 있다. 무너짐은 주위로 전염된다. 서로를 탓하지 않고 차가운 손을 놀린다.     



 

  뿔 모양 돌탑이 우리 주위로 가득하다. 각자의 시린 손은 주머니 안쪽에 있다. 몰두한 덕인지 몸이 차지는 않다. 어느새 등 뒤로 예닐곱 명이 서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중이다. 누구도 정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함께 돌탑을 쌓은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좀 더 남아 있으려는 듯하다. 모자를 쓴 이는 먼저 내려간 지 오래다. 어쩌면 드문드문한 버스 배차 탓에 진입로 앞 정류장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인사를 건네고서는 바로 떠나지 않는 나를 그들이 바라본다. 머뭇대다 입을 연다.

  “왜 그랬을까요?”

  중턱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대답이 돌아온다.

  “우린 알 수가 없어요.”

  강조하듯 재차 말한다.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헤어진다.

  산 아래로 내려가며 많은 것들이 흐릿해진다. 사방에 돋아났던 입술도 겨울잠처럼 잠잠하다. 그저 내리막길에서 헛디디지 않도록 신경을 쏟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라는 듯. 발을 딛고 지지한다. 붙잡고 놓는다. 이런 단순명료함이 그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그 다부진 몸과 내리막 사이의 긴장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가 ㅁ산의 경험을 모두에게 건넨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까. 아니, 내 오만한 착각이다. 평생 많은 사실이 드러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혹은 동네에서, 자취방에서, 나는 동면을 마친 입술들과 다시 마주할 것이다. 예감은 사실이 되겠지. 그러나 지금의 어리석어진 몸뚱이는 모든 걸 믿음으로 승화시킨다. 단단한 채로 녹아가는 얼음 같은.

  내 옆으로 산을 오르는 긴 행렬이 지나간다.

  하나같이 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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