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동현 Nov 15. 2023

[단편소설] 순례(4)

  그가 산을 올랐을 때도 겨울이라고 했다. 산길이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어요. 등산을 많이 한 분이라면 시시하게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래도 꽤 걸었던 거 같은데? 한 시간 반 걸었으면 높은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한라산은 왕복 여덟 시간이라고? 헐…… 그치만, 그치만 오히려 그래서 머리를 비울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고 시간도 지나 있고 하니까 개운했나 봐. 막상 팬들이 ㅁ산의 중턱까지 오르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차이는 나름대로 경쾌한 배신감이었다. 팬들은 직접 산에 오름으로써 자신과 그의 신체를 재어 보곤 했다. 충동적으로 중턱까지 오르고서는 경치까지 즐긴 후 내려갔다는 그의 몸놀림을 상상한 것이다. 나도 그랬다. 운 좋게 겨울이라는 시기도 맞아떨어진 김에 사흘째의 마지막 일정에서 산을 오르내리며 중턱까지 향하는 그의 순간순간을 상상하고 싶었다. 상상. 그렇다. 비록 지금은 이틀째지만, 산에서 내려오면 적막하고 외로운 자취방으로 바로 돌아갈 계획이지만, 어쨌든 상상하고 있다. 곳곳에 멋대로 돋아난 입술들이 떠드는 말을 듣는 것 역시 상상이라면.

  걷기. 미끄러지기. 밧줄 잡기. 무릎 짚기. 숨 들이마시기. 뒤돌아보기. 발가락 움츠리기. 무릎 구부리기. 허리 숙이기. 눅눅한 숨 내쉬기. 차가운 코끝 문지르기. 갈증. 주먹 쥐었다 펴기. 등에 멘 가방의 무게 가늠하기. 숨소리로 세상 가득 채우기. 내려다보기. 나뭇가지 잡기. 바닥 짚기. 출발 생각하기. 끝 생각하기. 걸음걸이 세기. 시간 보지 않으려 애쓰기. 발에 치이는 돌멩이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기. 쓰레기 피하기. 미약한 소리 뒤로하기. 멈추기. 멈췄다고 생각하기. 나아가기. 나아간다고 기만하기. 눈 끔뻑이기. 머리 긁기. 점퍼 안쪽 긁기. 흙 지나기. 바위 지나기. 나뭇가지 지나기. 나뭇잎 지나기. 풍경 지나기. 뿌리 지나기. 풀 지나기. 이 전부에 돋아난 입술 바라보기. 결국 바닥 바라보기. 멋대로 놀리는 입술 지나가기. 피할 수 없는 말들에 잠기기. 헤엄치고. 메이크업. 의상. 무대. 첫 만남. 음원 순위. 헤엄치고. 스트리밍. 생일. 유튜브. 브이앱. 인스타그램. 팬카페. 버블. 팬클럽. 게시글. 헤엄치고. 뒤늦게, 소음. 먹방. 브이로그. 비하인드. 웃음. 눈맞춤. 셀카. 직캠. 인터뷰. 헤엄치고. 응원법. 앨범. 파트. 가사. 안무. 건강. 숙소. 차량. 매니저. 졸업앨범. 헤엄치고. 연습실. 팬사인회. 팬미팅. 거리감. 콘서트. 앵콜. 응원. 함성. 거리감. 열애설. 거리감. 무지. 거리감. 말하고 듣고 잠기고 헤엄치고…… 모든 게 이명의 방식으로 끝없이 늘어질 무렵, 걸음을 멈춘다. 중턱에 서 있다.

  요 며칠 검색했던 장소.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건조한 바람이 분다.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긴다. 땀이 나지는 않아도 점퍼 안쪽에 머금어진 열기가 있다. 여기에 다다랐다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직도 멀었다는 듯 바위에 쇠기둥을 박아 만든 길과 이정표다. 그는 저 너머로는 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려보지만 헤아려지지 않는다. 나는 바위가 완만하게 돌출된 지대로 향한다. 작은 돌탑들이 보인다. 돌탑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 무수하다. 주변에 모을 돌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이만큼 그러모았는지. 그가 쌓았다던 돌탑도 안쪽 어딘가에 있을 거였다. 시야의 전부를 그가 보았다는 풍경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끝자락에 다다르자 벽에 붙어 있느라 보이지 않았던 누군가가 서 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서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거리를 두고 선다. 난간도 주의 표시도 없다. 저 너머로 바위산이 맑은 하늘을 등지고 있다. 울퉁불퉁한 표면이 선명하다. 황량할 정도로. 올라왔던 산길의 궤적이 보인다. 더 멀리로는 허허벌판과 같던 겨울 논밭이 펼쳐져 있다. 전부 의미의 씨앗이 되어 피어오른다. 애당초 착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온전히 나를 위한 착각. 만난 적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여기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 지나가는 속도를 누리며, 분분한 봄을 덧칠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이 만개한다. 여전한 착각으로 그의 심정을 상상한다. 정말로 착각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것만은 착각이 아니리라는 예감이 사방으로 번진다. 아래쪽에서는 벌거벗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 끝으로 나를 겨누고 있다. 거기에 온몸이 꿰였으면 좋겠다. 나머지 몸뚱이도 몰려온 나무들이 물어뜯거나 짓밟아 알아볼 수 없도록 훼손시켰으면 좋겠다. 질책과 위로, 은폐 따위를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면 스스로 해내면 된다. 나 따위가 선택할 수 있는 진심이란 그런 게 아닐까. 바위 끝을 넘어, 허공을 향해. 나아간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옆에 서 있던, 모자를 푹 눌러 쓴 그 사람이다.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자세로 울고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유약함을 질투하며, 자리에 앉는다. 바위의 냉기가 몸을 타고 오른다. 무표정을 지으며 옆의 슬픔을 바라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단편소설] 순례(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