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년- 2013년)
그림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제주서 받은 축복 중에 하나는 미술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제주 서부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 김창열미술관, 유동룡미술관, 본태박물관을 거쳐 제주시 제주도립미술관, 서귀포 기당미술관을 둘러보았습니다. 한결같이 감동이 밀려옵니다. 혹여 손님이 오시면 부러 모시고 가거나 여행지로 추천드립니다. 볼 때마다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제주현대미술관 내부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다가 야외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 마셨는데 아주 특이한 화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보집입니다. 분명 풍경은 제주인데, 모든 것이 노란색입니다. 카페 주인장에게 화보집 가격을 물으며 느낌을 잠깐 얘기했더니 이 색을 '황갈색'이라고 하더니 "참 독특하지요. 혹시 더 관심이 있으시면 서귀포에 기당미술관에 가보세요. 거기 몇 점 안되지만 이분 작품을 볼 수 있으실 거예요" 합니다. 얼마 후 서귀포에 가서 그의 실제 작품 앞에서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제주가 저렇구나, 바람, 태양, 초가집, 말, 까마귀, 바다, 홀로 있는 사람, 이런 것이 제주의 내면적인 모습이구나.' 화가의 생각이 제 감정과 밀착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람'을 표현하는 것에 심한 동요가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강압과 심리적인 눌림을 상대하는 1차적인 방어 방법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나를 향해 몰아치는 폭풍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제주사람들의 삶이었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다음 글은 제 느낌을 증명해 줍니다.
태풍이 초가 뒷마당에 몰아친다. 그 폭풍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속의 사람은 태풍에 날아가지 않게, 살아남으려고 구부리고 있는 것이다. 내 작품에서의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속 저항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 작가가 살던 시대의 마음, 심상(心想)의 표현이다. ('황갈색 폭풍 속 화가 변시지' 인터뷰 《미술문화》 특별부록 2003. 1)
변시지화백은 1926년 제주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변태윤과 이사희 사이에 5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31년 부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일본 소학교 2학년 시절 덩치가 두 배쯤이나 크고, 힘이 장사였던 상급생 학생과 씨름대회를 하다, 오른쪽 대퇴부의 관절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극심한 통증으로 혼절했고, 치료를 받았지만 병원에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그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림은 그의 벗이었고, 지팡이는 그의 벗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길을 나설 때는 지팡이가 그의 허리를 받쳐주고, 쉴 때는 같이 쉬었습니다. 지팡이가 더듬는 소리, 바닥을 쿵쿵 찍어대는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는 건 변시지였고. 잠을 잘 때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부름을 기다리는 것 또한 지팡이였습니다. 그는 평생 6개의 지팡이를 남겨 놓았지만, 작품 속에 남긴 그의 지팡이는 족히 수백 개는 될 것입니다.
제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지난 6개월간 협재에 살면서 자연이 주는 놀라운 생동감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폭풍 속 바다와 잔잔히 해수면에 빛을 반사하며 은근한 색조를 띠는 바다, 살아있는 것처럼 바다는 제 몸을 뒤 집어 어떨 땐 사납게 포효하고, 어떨 땐 소녀처럼 수줍어합니다. 생태계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처음 경험합니다. 변시지화백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바다의 양면적인 모습에 고개가 끄덕거려집니다. 사납고, 부드러운 바다!
제주인들과 삶의 애환을 같이했던 동물이 바로 조랑말과 까마귀이다. 제주의 토질은 대부분 화산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척박할 뿐만 아니라 강풍이 휘몰아쳐 토사와 종자가 바람에 날리고 비가 오면 유실되기 쉬웠다. 조랑말은 제주의 주곡(主穀)인 조밭을 밟아줌은 물론, 연자방아를 돌리거나 수송을 하는 등, 그 역할이 매우 컸다. (《예술의 풍토》 변시지 1988, p87)
예술이 시대의 반영, 시대의 전조, 시대의 예언, 또는 인간과 인간의 소통 등 이처럼 경사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출구를 잃어버린 근원의 질문이다. (변시지 《예술과 풍토》 열화당 1988)
초가집 안에 사람 한 명이 엎드려 있고, 하늘에서 까마귀가 춤을 추는 것이 난무 작품이다. 까마귀는 미래를 안다. 한국에 민주화가 온다는 걸 예감하는 것이다. (KBS TV History '한국현대사 증언' 2012)
해방이 되던 해 그는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도쿄로 상경하여 테라우치 만지로의 문화생으로 들어갑니다. 1947년 그는 일본 문화성 주최의 일전(日展)을 주관하는 일본 최고의 중앙화단으로 알려진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 '겨울나무' A, B 두 점이 입선하고,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여인'이 입선합니다. 또한 이듬해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역대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합니다. '베레모의 여인', '만돌린을 가진 여자', '조춘', '가을풍경' 4점이 수상되었고, 광풍회 정회원으로 추천됩니다.
1957년 변시지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접고 서울대학교 초청으로 한국으로 영구 귀국합니다. 이듬해 그는 서울 화신백화점 화신화랑에서 '유화 유고 전'이라는 개인전을 여는 것으로 한국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1년 정도 서울대에서 강사를 하다가 그는 1960년 서라벌대학교 미술학과 학과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해 4.19가 나던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가 출신 이학숙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한국에서 느낀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려면 일본에서 그리고 느꼈던 그러한 형식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서양철학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가장 한국적인 건축물인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비원에 들어가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새로 공부하는 자세로 시작한 것이다. ('나의 예술' 《경향신문》 1958)
스스로 생각할 때도 나의 화풍은 세 번의 변신을 한 것 같다. 일본 시절, 초기의 화풍은 인상파적 구도에 구상적 표현을 즐겨 썼다. 서울생활에서는 비원 등을 소재로 섬세하고 우아한 한국의 전통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제주에서는 피부에 닿는 황토적인 것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화는 서양의 모방이 아닌 나만의 예술세계이다. (《제주신문》 1980.3.2)
160년 전통, 세계 최대 박물관인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Smithsonian Museum)에는 그의 작품 두 점이 2007년부터 10년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까마귀의 원무와 제주풍경을 담은 유화 '난무'(1997)와 여백의 미를 밀도 있게 표현한 작품 '이대로 가는 길'(2006)입니다. 이 박물관의 아시아 문화팀장인 폴 마이클 테일러는 인터뷰에서 변시지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가장 유명한 한국인 예술가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제를 미국인들에게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예술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변시지를 주목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는 비전통적인 기법인 오일캔버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주섬을 그린 그의 표현을 보면 그는 지역적인 특성에 의해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 예로 이것은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그의 작품에 나오는 사람은 등이 굽고, 지팡이를 지고 있으며,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고독해 보입니다. 본인 모습과 같습니다. 1975년 사십 대 후반부터 그의 제주생활은 2013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의 38년간 이어집니다. 제주로 건너온 후 그는 술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괴롭고 고독했습니다. 제주를 표현하는 그림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장판지 색의 제주풍토가 떠올랐고, 단조롭고 둔탁한 동양적인 검정색으로 추상적인 제주를 표현하는 본인만의 화풍을 발굴해 냈습니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감정이 복받쳐 오르다가 다시 잠잠해지곤 합니다. 그것은 사나운 폭풍과 해녀가 잠수하고 있는 물속의 고요한 바다와, 거친 바람과 돌담에 뚫린 구멍 속을 통과하는 가늘한 바람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근래에는 초가집도 빼고, 까마귀도 빼고, 사람도 빼고, 그저 바다와 하늘만 그릴 때도 있다. '떠나가는 배' 하나 그려 놓기도 한다. 등장하는 소재들이 점점 사라지고, 언젠가는 점 하나로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 그러다가 하나를 넣기도 한다. (KBS TV History '한국현대사 증언' 2012)
2025년 6월 나는 비행기에서 점 하나로 보이는 제주를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제주살이 시작이었습니다. 언젠가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그때도 제주는 한 개의 점일 것입니다. 우연히 만난 변시지의 작품을 통해 나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제주가 보였습니다. 그는 그렸지만 나는 보였습니다. 누구나 한번 사는 인생,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랜 고독과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자신만의 제주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빈 공간의 제주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입니다. 인생처럼 섬은 언젠가 빈 공간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비어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평안을 주는지 깊이 통찰하지 않는 이들은 모를 겁니다. 그림과 문학이 가는 길은 같습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돌담 구멍이 바깥세상과 내부의 나를 서로 通하게 하듯 세상과 나는 점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어있어 누군가 와서 채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