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의 서재_10
강가의 모닥불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하늘의 함박눈이 모닥불 위에 내린다
모닥불은 함박눈을 태우지 않고 스스로 꺼진다
함박눈은 모닥불에 녹지 않고 스스로 녹는다
나는 떠날 시간이 되어 스스로 떠난다
시간도 인간의 모든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이제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다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
(정호승의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中)
이 詩가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눈과 불은 서로를 태우고, 녹이지만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눈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지만 스스로 때가 되면 녹을 따름입니다. 불을 탓하지 않습니다. 가난도 그렇습니다. 내 잘못이고 내 부족 때문입니다. 가난 때문에 못 배운 게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불도 때가 돼서 꺼졌을 뿐입니다. 눈이 녹였다고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더 이상 여기까지 오게 한 과거로, 앞으로 가야 할 미래 그 곳으로도 이제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알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미뤘던 그 짧은 사랑도, 떠난 이를 증오하며 보냈던 그 긴 시간도 실은 그 사람 잘못 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한 선택이었음을.
.....
이제 죽음이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쓰러질 듯 변기에 앉아 있으면 미운 이도 고운 이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미워할 사람이 단 한 사람은 있어야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당신을 영원히 미워하겠습니다. (정호승의 또 다른 詩 '약속할 수 없는 약속'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