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맞아! 아무튼 내가 맞아!

by 몰드브 회사원



대학생 때 영화 비평글 레포트를 작성해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교수님께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자 미리 낸 레포트에 대해 잠시간 평가를 해주셨다. 교수님은 글을 잘 썼다며 처음에는 학생이 쓴 글처럼 느껴지지 않아 다른 데서 베껴왔는지 의심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보니 학생이 쓴 것이 맞았다는 말로 평가를 마무리하셨다. 하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칭찬의 말만 내 마음에 큐피드 화살로 꽂혔다. 나는 '학생이 쓴 것 같지 않게 잘 썼다'는 말만 마음 가득 채웠다.



황홀한 평가를 품에 안아 들자 나는 다른 수업 과제에 또다시 다른 영화의 비평을 제출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내게 페미니즘의 갈래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데 내가 쓴 글의 페미니즘은 너무 뒤죽박죽이라며 비판의 말씀을 비평 시간 내내 하셨다. 아마 글에 개연성이 없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비평 시간 말미에 그럼에도 결론 부분이 맘에 든다며 그 부분을 발췌해 짧게 읽는 것으로 비평이 끝났다. 이 때도 나는 비판은 뒤로 하고 '결론이 마음에 든다'는 말만 가득 채웠고 집에 가면서 내가 쓴 결론을 수십 번 읽으며 '결론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불어넣었다.



교수님의 평가가 있기 전에도 비평글의 도입부를 혼자 읽어보며 만족했던 기억이 난다. 뒤이어 쓴 영화비평글에서 나도 그 글의 결론 부분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확신하기에는 좀 부족했다. 타인 눈에도 그렇게 비칠까 의심이 들었다. 나는 혹여 부족한 결과물을 만들고도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으로 비춰질까 조심스러웠다. 우스운 사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내게는 경계 대상 1순위였다.



그렇게 나는 부족한 상태로 살다가 타인에 의해 나머지를 채웠다. '이 표현 나는 맘에 드는데 나한테만 맘에 드는 걸까?'라는 질문은 내 마음 저변에 쪼그라진 상태로 희미하게 존재하다가 '이 표현 괜찮군'하는 타인의 부름을 받아 재빨리 커졌다. 맘에 드는 내 마음이 틀릴까 걱정하다 듣게 된 타인의 칭찬은 살아있는 동안 이따금씩 상기되고 상기되고 또 상기됐다. 내가 혼자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다른 사람이 짚어 칭찬하면 타인과 나의 평가가 일치한다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마음을 채우고 만족하는 방법을 아마 처음부터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방법을 알기 위해 궁리했다. 대학생활 내내 나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분석하고 괴로움을 지우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마음에 이변이 있을 때마다 내 마음이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내 나름의 분석을 친구들과 공유했고 이따금 친구들의 조언이 있었다. 서로를 분석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분석가들의 성토장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사랑하라 외치는 콘텐츠를 줄곧 좇았지만 돌아보면 나는 계속 거기서 삐끗거리고 벗어나는 선택만 했다. 내 분석들이 틀렸던 걸까.



아주 가끔 그때 그 글들을 찾아본다. 텀이 길어 찾을 때마다 오래전 쓰다만 이메일을 뒤져보고 대학교 때 과제로 낸 메일도 찾아보다가 드라이브에 검색도 해본다. 우연히 예쁘고 좋은 남의 글을 읽게 되면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들어 허겁지겁 찾게 된다. 그리고 좀 웃기지만 10년 전 내가 쓴 글을 다시 볼 수 있음에 안도한다. 그 글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면 어쩌나 서글픈 맘으로 걱정했으니까. 이제 와 읽어보니 그리 잘 쓴 글도 아니고 교수님이 왜 학생 글이라고 했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비평글의 결론은 여전히 맘에 든다. 그때도 내 맘에 들고 지금도 내 맘에 든다.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그거다. 그 화살의 큐피드는 나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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