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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니아' 감독의 의도와 결말 해설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아리 애스터의 만남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oqWhf1yJfx4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부고니아>를 관람했습니다. 이 작품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영화입니다.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가 주연을 맡고, <유전>, <미드소마>로 독보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아리 애스터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소식에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영화는 '옥솔리스'라는 거대 기업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아마추어 양봉을 하는 '테디'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테디는 최근 발생하는 꿀벌 군집 붕괴 현상과, 자신의 어머니가 옥솔리스의 임상시험 부작용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이 모든 불행이 외계인의 소행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외계인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CEO, 엠마 스톤이 연기하는 '미셸'이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테디는 사촌 '돈'과 함께 미셸을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하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녀에 대한 '심문'을 시작합니다.


<부고니아>는 이 지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과연 테디가 정말 미친 것일까, 아니면 미셸이 정체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는 걸까'라는 팽팽한 심리적 줄다리기를 그려내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로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관객까지 축축하고 불편한 지하실에 함께 갇혀버리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더 솔직하게는, 중반부까지는 지루하다고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상당히 많은 대사량, 그리고 전반적으로 어두운 톤이 상당한 피로감을 주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떤 점이 아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는지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부고니아'의 의미

먼저 영화의 제목인 '부고니아'의 의미부터 짚어봐야 합니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가 매우 직설적인 제목이었던 반면, '부고니아'는 훨씬 은유적입니다.


'부고니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소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는 고대 지중해 문명에서 믿었던 일종의 신화적 의식으로,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 떼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기반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희생이 피를 흘리지 않고, 즉 소를 질식시켜서 이뤄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부패한 것', 다시 말해 죽은 소의 사체에서 '새로운 생명'인 벌이 태어난다는 이 신화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인류가 모두 사라진 뒤에야 벌들이 다시 벌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이 신화적 의식에 대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나름의 재해석으로 느껴졌습니다.

꿀벌, 노동자, 그리고 '여왕벌' 미셸

영화 속 테디는 옥솔리스의 직원이자 '양봉가'입니다. 그는 거대 기업이 초래한 환경 오염 때문에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으며, 이 벌들의 죽음을 인류 멸종의 전조로 받아들입니다.


이 꿀벌 군집 붕괴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착취당하는 현실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미셸이 벌을 '근면함 때문에 착취하기 쉬운 존재'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거대 기업이 노동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예로, 미셸이 직원들에게 5시 30분에 퇴근해도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직원들을 배려하는 좋은 CEO처럼 보이지만, "해도 된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권력 관계 속 '허락'이 필요함을 전제합니다. 게다가 "일이 있는 사람은 자율적으로 하고..."라며 계속해서 조건을 붙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직원 복지를 챙기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또한 미셸이 마치 '여왕벌'처럼 그려진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원작에서 남성이었던 '강사장'을 여성 CEO '미셸'로 변경한 것은, 단순히 란티모스 감독의 뮤즈인 엠마 스톤을 캐스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CEO이자 외계인으로서 인간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여왕벌은 자신의 군집, 즉 인류를 착취하고 군집 전체를 붕괴시키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몰고 오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리 애스터의 그림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아리 애스터의 색깔 역시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유전>이나 <미드소마>에서 그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가족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비극적 선택이라는 패턴이 <부고니아>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테디의 어머니가 임상실험으로 식물인간이 되고, 그 상실감과 트라우마가 테디를 극단적인 행동으로 내몹니다. 더 나아가 영화 중후반부에는 테디가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정황이 암시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초반에 테디와 돈이 화학적 거세를 하는 장면이 단순히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테디가 겪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왜곡된 시도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는 아리 애스터가 즐겨 다루는 '상실로 인한 타락'이라는 서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맹목적인 팔로워 문화에 대한 풍자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인물은 '돈'이었습니다.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 에이든 델비스가 연기한 '돈'은, 자기만의 확고한 생각 없이 테디가 강하게 주장하면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물입니다.


중간에 '이게 맞나?' 하고 테디의 주장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테디의 언변에 다시 수긍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강한 주장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자신만의 명확한 판단 기준 없이 주변의 강한 목소리나 여론에 편승하는 집단의 맹목성과 팔로워 문화에 대한 풍자로 읽혔습니다. 이는 비단 가벼운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요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025년의 집단적 음모론

바로 이 지점에서 원작과의 22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두드러집니다.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 속 '병구'의 음모론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한 개인의 광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2025년의 <부고니아>에서 '테디'의 음모론은, 한 개인의 광기가 집단적 음모론 문화와 만나 더욱 극대화된 양상을 보입니다. 영화 속 대사로 테디가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것이 바로 2025년 현재의 음모론 확산 방식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구 평면설' 이미지 역시 이런 맥락입니다. 2003년에는 그저 황당한 농담이었겠지만, 지금은 큐어넌(QAnon)을 비롯해 인터넷을 통해 실제로 확산되고 있는 집단적 음모론 문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굳이 먼 예를 찾지 않더라도, 국내에서도 현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그럴듯하게 짜깁기하여 집단적으로 음모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현상을 너무나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인 진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교묘한 비틀기를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평평한 지구의 모습이 사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테디의 외계인 음모론 역시 영화 속에서는 결국 진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세계관은 '테디의 음모론이 전부 진실인' 세계관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런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오히려 '현실'을 역설적으로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즉, 현실 세계에서는 기후 변화 같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줄 외계인이나 극적인 음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란티모스가 생각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극단적인 해결책은 인류가 지구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이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강조하는 셈입니다.

인상 깊었던 장면들

물론 영화에 대한 감상이 '불호'에 가까웠음에도 인상 깊은 장면들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셸이 차 트렁크에 있는 부동액이 테디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녀의 말이 과연 진짜일지, 혹은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말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서스펜스가 대단했습니다. 원작을 봐서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이 장면에서 제시 플레먼스와 엠마 스톤의 팽팽한 연기 대결이 빛을 발했습니다.


둘째는 테디가 과거 인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입니다. 초반에 미셸의 신체적 특징을 보고 외계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 과거 외계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는 테디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는 영리한 연출이었습니다.

'부고니아' 의식의 완성

결국 테디가 옳았습니다. 미셸은 외계인이었고, 인류를 말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테디의 승리가 아닙니다. 영화는 그를 진실을 밝혀낸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고한 희생자들을 낸 가해자이자, 외계인을 잡기 위해 수많은 인체 실험까지 자행한 광신도로 함께 그립니다.


인류가 멸종한 뒤, 고요한 세상의 풍경을 비추는 엔딩은 마치 한 편의 행위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널린 시체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묘하게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제야 벌들이 돌아옵니다. '부고니아' 의식이 성공한 것입니다. 인류라는 '죽은 소'의 사체 위로, '새로운 생명'인 벌이 돌아오면서 지구는 비로소 '구원'받았습니다.


원작의 제목이 <지구를 지켜라!>였습니다. 이 결말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필수 요소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미셸과 외계인 집단이 '인간'이 아닌 '지구'를 지킨 셈입니다.

의도된 불편함

제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지루함'과 '불편함'은 어쩌면 이 영화가 정확히 의도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부고니아>는 관객에게 통쾌함이나 쾌감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인류는 지구에 필요합니까?'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아마도 그렇지 않을걸요?'라고 냉소적으로 답하는 듯했습니다. 각본가 역시 인터뷰에서 "기후 재앙이 점점 더 심해지고 이 행성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훨씬 더 최우선 과제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벌들이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인류라는 실패한 실험이 끝난 뒤에야 지구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어두운 낙관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영화를 즐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의도와 메시지만큼은 명확하게 전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부고니아>는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2시간 내내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무거운 분위기 탓에 분명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의 기괴하고 실험적인 연출을 좋아하시는 분들, 아리 애스터 감독의 트라우마 기반 스릴러를 즐기시는 분들, 혹은 환경 문제와 집단의 맹목성 같은 사회적 메시지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작 <지구를 지켜라!>가 가졌던 독특한 매력과 한국적인 정서를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22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작 <부고니아>를 어떻게 보셨나요? 인류는 정말 지구에 필요한 존재일까요? 여러분의 다양한 감상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저도 읽고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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