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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프랑켄슈타인' 감독의 의도와 결말 해설

'창조'가 아닌 '양육'의 책임을 묻다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1XgNlIOKpNY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평생의 꿈이자 숙원 사업이라고 공언해왔던 바로 그 프로젝트, <프랑켄슈타인>이 넷플릭스를 통해 드디어 공개되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아는 1931년 클래식 작품이나 1994년작과는 당연히 다른 작품이며, 오직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셰이프 오브 워터>가 마치 물처럼 유연하고 따뜻하게 흘러가면서 관객의 마음을 적시는 감동을 줬다면, 이번 <프랑켄슈타인>은 압도적인 미장센과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다소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지다가도 마지막에는 묘한 따뜻함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영화 공개 초기에 "화려한 비주얼이 오히려 서사의 호흡을 압박한다"거나 "서사적 밀도보다 감정의 장식이 앞선다"는 평가들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감독이 수십 년간 마음속에 담아왔던 방대한 메시지를 한정된 시간 안에 전부 응축하려다 보니,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줄거리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스포일러 없이 간단하게 줄거리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오스카 아이작이 연기한 천재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에 도전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제이콥 엘로디가 연기한 '피조물'이 정작 세상에 나온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빅터는 피조물을 없애려 하지만, 피조물은 극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녔지만, 세상으로부터 '괴물'이라 불리며 버림받은 피조물. 그는 자신을 창조하고 버린 '아버지' 빅터를 향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안고 빅터를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델 토로의 미학

개봉 전부터 이 영화는 델 토로 감독이 10대 때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바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였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 열망은 영화 전반에 깔린 '고딕 호러'의 미학과 제작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음울하고 어두운 색감,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그 속에서 외롭게 떠도는 피조물의 모습은 그 자체로 피조물의 내면적 고독과 슬픔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구현해낸 방식입니다. 델 토로 감독은 "디지털도, AI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직접 페인팅하고, 건축하고, 망치질하는 옛날 방식의 장인정신을 원한다"고 밝히며 수작업을 고집했습니다. 실제로 거대한 성과 연구실 세트가 전부 지어졌고, 제이콥 엘로디가 매일 몇 시간씩 받아야 했던 피조물의 특수 분장 역시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장인정신은 단순히 시각적 쾌감을 넘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빅터가 여러 시체의 부분들을 모아 직접 손으로, 바늘로 꿰매고 전기를 연결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델 토로 감독 역시 수십 년간 스케치하고 디자인하며 모든 디테일을 손으로 '만들어'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창조주의 고집스러운 손길이 영화 안팎으로 닮아있는 셈입니다.

원작의 재해석
이제 스포일러를 포함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원작 소설의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듯, 빅터 역시 신의 영역인 '생명 창조'를 훔쳐 자신에게 선물하려 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델 토로 감독은 원작이 쓰인 19세기가 아닌 21세기의 시각으로, 이 주제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심화시킵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작업 코드명은 '탕자 아버지(The Prodigal Father)'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 방탕한 생활 끝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뒤집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어서 그 상처를 되물림하는, 깨진 가족의 전기"라고 밝혔습니다.


즉,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의 오만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창조'가 아닌 '양육'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입니다. 이 지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빅터는 '피조물'을 만드는 것, 즉 '출산'에만 집착했지, 그 이후의 '양육'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순간의 성취감과 명예만 생각했을 뿐, 그 생명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자신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비극은 대물림됩니다. 빅터의 아버지는 빅터에게 따뜻한 애정을 주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빅터는 사랑과 책임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빅터가 창조한 피조물에게 그대로 대물림됩니다.


결국 이 영화는 상처받은 아버지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세대 간 폭력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이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부모의 책임'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개인사가 자연스럽게 투영됩니다. 델 토로 감독 본인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내가 젊었을 때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들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였겠지만, 지금은 아버지로서 용서를 구하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고백이자, 아버지에 대한 이해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사죄인 셈입니다.

피조물의 여정

피조물이 겪은 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공포와 혐오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흉측한 외모만 보고 돌을 던지고, 쫓아내고, 괴물이라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피조물은 인간 사회를 관찰하며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이해하며 점점 더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간적이 될수록 자신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절망 역시 함께 커져갑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성을 가졌지만, 외모 때문에 영원히 인간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절망. 이 절망이 결국 빅터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게 됩니다.

영화의 핵심 상징 분석

얼음에 갇힌 배와 선장

영화는 북극의 얼음 바다에 갇힌 배에서 시작하고 또 그곳에서 끝이 납니다. 이 설정은 매우 영리합니다. 얼음에 묶인 배는 빅터의 '복수심'과 '광기'에 사로잡혀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그의 얼어붙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배의 선장 역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목적지(명예와 야망)에 도달하기 위해 선원들(인간성)의 안전을 무시하고 위험한 항해를 강행하려 했던 '또 다른 빅터'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빅터와 피조물의 끔찍한 사연, 즉 맹목적인 야망이 낳은 비극을 목격하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습니다. 그는 '목적지'가 아닌 '선원'을 택하며 인간성을 회복합니다. 이는 빅터가 일찍 깨달았다면 맞이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미래'였습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피조물이 배를 밀어주는 장면은 빅터를 용서한 행위의 연장선입니다. 그는 자신과 빅터가 갇혀 있던 '복수의 순환(얼음)'에서 벗어나, 선원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자신을 괴물 취급했던 세상을 향한 복수가 아닌, 구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느질과 봉합의 흔적

'바느질'과 '봉합'의 이미지도 반복됩니다. 피조물은 여러 시체의 부분들을 꿰맨 존재이며, 그 봉합선은 단순한 흔적이 아닌 상처의 표식입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 빅터 역시 상처를 입고 봉합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누가 진짜 괴물이고 누가 상처받은 존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배우들의 열연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영화의 장엄함과 슬픔을 더하는 가운데,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스카 아이작은 광기와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빅터를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그가 연기한 빅터는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었지만 결국 비극을 낳고 마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입니다. 때로는 자신만만하고, 때로는 불안하며, 때로는 후회에 잠기는 감정의 변화가 섬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제이콥 엘로디는 갓 태어난 순수함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오가는 피조물의 복잡한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미아 고스 역시 단순히 여주인공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또 다른 축인 '공감'과 '연민'을 상징하는 인물 엘리자베스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혼란스러워했을 지점, 바로 '감정선'입니다.


먼저 엘리자베스의 갑작스러운 연민입니다. 피조물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은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도와주려 하는 모습은 당황스럽습니다. 감독은 엘리자베스를 빅터와 정반대되는 '무조건적인 공감'을 지닌 인물, 즉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처럼 외로운 존재를 알아보는 인물로 설정한 듯합니다. 피조물이 자신에게 처음 따뜻함을 보여준 엘리자베스에게 감정을 갖는 것은 이해되지만, 엘리자베스의 감정은 그 근거가 충분히 쌓일 시간을 갖지 못해 "갑자기?"라는 반응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 '피조물이 빅터를 용서하는 감정선'입니다. 이는 원작과 차별화되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입니다. 감독은 "이 영화는 불완전함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라며, 학대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가 아닌 용서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용서가 실행되는 과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묶고, 불태우려 했던 아버지를 향한 그 모든 고통과 분노가, 죽음 직전의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에 정리되는 것은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용서는 논리적이기보다 감정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피조물의 내면 변화를 좀 더 세밀하게 따라갈 시간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의 마지막, 북극의 얼음 위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피조물의 모습이 나옵니다. 평생 괴물이라는 낙인에 갇혀 살았던 그가 마침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는 순간입니다.


델 토로는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진짜 괴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흉측한 외모의 피조물이었을까요? 그를 만들고 버린 빅터였을까요? 아니면 그를 괴물 취급하며 돌팔매질한 사람들이었을까요? 감독은 '괴물'이 외모가 아닌 행동으로 정해지며, 진정한 괴물은 인간의 편견과 혐오,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바라본 '프랑켄슈타인'

이 200년 전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AI 기술을 보며, 빅터가 피조물을 만든 것과 우리가 AI를 만드는 것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창조'의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지만, 그 창조물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빅터가 책임을 회피한 것처럼, 우리도 AI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이 영화는 '다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피조물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조금이라도 평범하지 않으면 '이상하다'며 배척하곤 합니다. 200년 전 이야기지만, 여전히 유효한 질문입니다.

총평

솔직히 말해, 앞서 언급한 갑작스러운 감정선과 긴 러닝타임으로 인한 느린 호흡은 아쉬운 점입니다. 전통적인 공포나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 집중하는 작품이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미장센과 철학을 사랑하는 팬, <판의 미로>나 <셰이프 오브 워터>를 인상 깊게 본 분들, 그리고 '괴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인 드라마를 선호하는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정리하자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최고작은 아닐지 몰라도, 야심 차고 묵직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괴물'을 통해 '아버지'와 '용서'를 이야기하는 거장의 슬픈 고백은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실수하고, 상처 주고,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따뜻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복수를 선택할 것인가, 용서를 선택할 것인가. 책임을 회피할 것인가, 책임을 질 것인가. 이 질문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자유롭게 의견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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