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이렇게 엉망으로 사는 건 아니구나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제 올해 목표 중 하나가 홍상수 감독의 작품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입문작으로 다들 입을 모아 추천해 준 영화가 바로 2010년에 개봉한 <하하하> 였죠. 그런데 제 지인 중에 누구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팬이 있는데, 제가 이 작품으로 입문하겠다고 하니 "좋은 영화도 많은데 왜 굳이..."라네요. 팬이라면서 대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어 묘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팬심으로 챙겨보는 민음사TV의 김민경 님이 예전 방송에서 홍상수 감독 작품이 싫은 이유를 따로 문서로 정리해둔 적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남기신 명언이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 싫어하자" 였는데, 도대체 홍상수 감독의 세계가 어떻길래 이런 반응들이 쏟아지는지 궁금증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불호와, 그 찌질한 인간 군상을 구경하는 맛에 본다는 호평이 팽팽하게 갈리잖아요. 과연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스스로도 무척 기대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서 감상했습니다.
기억이 교차하는 통영의 여름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영화감독 지망생인 중식과 영화평론가 문경이 청계산 자락에서 오랜만에 만나 대낮부터 막걸리를 기울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두 사람 모두 얼마 전 경남 통영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래서 이왕 술 마시는 김에 통영에서 겪었던 일 중 가장 좋았던 것들만 번갈아 가며 하나씩 꺼내놓자는 나름의 안주거리 룰을 정합니다.
여기서 영화의 연출 방식이 참 돋보이는데, 두 사람이 막걸리를 마시며 떠드는 현재의 시점은 흑백 사진들이 툭툭 끊기듯 슬라이드 쇼처럼 지나갑니다. 반면 각자가 신나서 썰을 푸는 통영에서의 과거 회상은 컬러 화면으로 펼쳐지죠. 이 구성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실 이 두 사람이 완전히 같은 시기에 통영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그들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얽히고설킨다는 점 때문입니다.
한쪽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쪽 이야기의 배경을 스쳐 지나가는 식입니다. 문경이 애틋하게 짝사랑했던 여자가 알고 보니 중식의 친한 친구 애인이었고, 중식이 무심코 밥을 먹으러 들렀던 식당이 다름 아닌 문경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인 식이죠. 화면 밖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한 다리만 건너면 전부 아는 사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정작 본인들은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른 채 각자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쁩니다. 이 기가 막힌 엇갈림과 정보의 불균형이 영화 내내 은근한 긴장감과 웃음을 유발합니다.
구질구질한 생활감
영화를 보며 내내 감탄했던 또 다른 지점은 캐스팅과 화면 속 인물들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유준상, 김상경, 문소리, 윤여정, 김강우까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평소엔 엄청 잘생기고 아름다운 배우들이잖아요. 그런데 카메라에 담긴 이들의 모습은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서 대낮부터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릴 것 같은, 그야말로 날것의 평범함 그 자체였습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만큼 무서운 자연스러움이었죠.
알고 보니 감독이 배우들에게서 특유의 배우스러움을 걷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더라고요. 덕분에 인물들이 숨기고 있는 위선이나 찌질함이 관객에게 훨씬 더 실감 나게 전달됩니다. 만약 다른 상업 영화들처럼 세련되게 각을 잡고 나왔다면 그저 스크린 속 허구의 이야기로 치부했을 텐데, 너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로 그려놓으니 보면서도 나도 저런 적이 있었나 하며 흠칫 놀라게 되더라고요.
특히 남자 캐릭터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기승전 여자 몸매 타령으로 빠지는 걸 볼 때면 계속 헛웃음이 샜습니다. 여자 캐릭터들의 설정도 만만치 않게 흥미롭습니다. 정화라는 인물은 도대체 왜 보는 남자들마다 술을 사달라고 찡얼거리는지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안 갔고, 문경의 어머니 역시 식당을 찾는 단골들에게 뜬금없이 내 아들 해라, 딸 해라 하며 오지랖을 부립니다. 처음엔 그저 정 많은 할머니인가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 행동들이 외로움이나 사람에 대한 결핍을 엉뚱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 처럼 보이더라고요. 그저 사람이 그리운 분 같아 깊은 짠함이 밀려왔습니다.
헛웃음 터지는 블랙 코미디
가장 속을 뒤집어 놓았던 캐릭터를 하나 꼽자면 단연 김강우 배우가 연기한 시인 정호입니다. 남의 말꼬리를 하나하나 잡고 늘어지며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태도가 일품이죠.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우리 주변에 꼭 한 명씩 존재하는 그런 피곤한 부류입니다. 극 중에서 겉으론 가장 고상하고 지적인 척하지만 실상은 제일 찌질한 인물이 바로 정호였어요. 뻔히 연기라는 걸 아는데도 당장 화면 속으로 들어가 딱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얄밉더라고요. 절대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부류를 어쩜 그리 잘 묘사했는지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연주와 중식의 관계도 기가 막힙니다. 본인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주제에 세상 애틋한 비련의 남녀 주인공인 척 꼴값을 떠는 모습이 가관이거든요. 저는 처음에 둘이 그런 사이인지도 모르고 보다가, 술자리에서 갑자기 처자식이 있다는 대사가 확 튀어나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해서 화면을 다시 돌려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적나라한 묘사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어쩌면 감독 본인의 변명이나 스스로를 투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소위 지식인 남성들을 조롱하는 은근한 셀프 디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져 있고 속물적인 인물들의 향연. 딱히 엄청난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습니다. 중간에 뜬금없이 꿈속에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씬은 압권이었죠. 중식이 그 위대한 영웅 앞에서 자신의 구질구질한 인생 조언이나 구하고 있는 꼴이라니, 절로 실소가 터졌습니다. 게다가 성옥이라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 너무 미화된 것 아니냐는 한 관광객의 질문에 갑자기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기까지 하죠. 질문 자체가 엉뚱한 건 맞지만, 정작 본인들의 꼬여버린 삶은 제대로 인지조차 못하면서 거창한 역사적, 도덕적 주제에 열을 내는 꼴이 지나고 보니 블랙 코미디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또 툭하면 시를 쓰고 읊어댑니다. 알량한 시 몇 구절을 빌려 자신들의 현실을 어떻게든 고상하게 포장해 보려는 속셈이 보여 계속 헛웃음이 났습니다. 나름 문학적인 사람인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한없이 가벼운 그 괴리감, 사실 그것이 이 영화가 꿰뚫고 있는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민망한 순간들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유의 카메라 줌인과 줌아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세련된 영화적 기법이라기보다는 누군가 옆에서 홈비디오를 찍다가 어? 하고 줌을 확 당겨 찍는 듯한 날것의 느낌이 강하거든요. 인물들이 스스로 뻘쭘해하는 순간 카메라를 확 당겨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같아서 지켜보는 저까지 덩달아 민망해집니다. 그저 날것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치였습니다.
좋은 것만 보고 살자
영화 속 거의 모든 식사 자리에는 어김없이 술이 등장합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자신들의 엉망인 삶을 버티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술기운을 빌려야만 그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지는 건지 술을 썩 즐기지 않는 제게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요.
무엇보다 "좋은 것만 보고 살자"라는 대사가 아주 많이 반복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긍정적이고 따뜻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자는 좋은 삶의 태도로 들렸거든요.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엔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해결된 척 덮어두고, 잘못된 행동을 어물쩍 넘어가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기억을 가위질한 채 실실 웃는 사람들이 내뱉는 자기 방어였으니까요.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자신의 꼬인 인생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하거나 상황이 나아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여전히 비겁하고 속물적인 상태로 영화가 끝나버리죠. 두 남자가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아름다운 통영의 추억이라는 것 역시, 자신들의 부끄러운 짓이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은 싹 다 지워버린 채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골라 편집해 낸 그들만의 얄팍한 정신승리일 뿐입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봅니다. 통영의 푸른 여름을 배경으로 호탕하게 하하하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덮어버린 현실에 대한 씁쓸한 헛웃음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어떤 화려한 볼거리나 속 시원한 사이다 결말을 기대한다면 무척 슴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나만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사는 건 아니구나 하는 묘한 위로를 받고 싶은 날이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들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주변에 이런 등장인물 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아니면 내 안에도 숨기고 싶은 찌질함이 있는 것 같아 뜨끔하진 않으셨는지 댓글로 편하게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