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문제적 SF 영화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리뷰 방송 : https://youtu.be/FykSJje-mbQ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을 드디어 감상했습니다. 국내외 시사회에서 쏟아지는 호평 덕분에 기대감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는데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깊은 만족감을 선사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즐겁고, 감독의 의도와 메시지, 숨겨진 은유들을 곱씹으며 보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한,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소모품 인간, 익스펜더블
영화의 주인공 미키 반스는 로버트 패틴슨 배우가 맡아 열연했습니다. 그는 '익스펜더블', 즉 소모품으로 불리는 존재입니다. 오염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 니플하임을 개척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각종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이전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프린트'되는 역할을 반복합니다. 소모품이라는 직역이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합니다.
미키는 니플하임 개척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희생됩니다. 방사능 노출 실험을 통해 신체 반응 데이터를 얻고, 새로운 행성의 바이러스를 흡입하여 백신 개발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며, 새로 개발한 배양육을 먹어 인간에게 무해한지 검증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미키에게 검증되지 않은 개발 중인 진통제를 주사하여 효과를 관찰하기도 합니다.
과학자들이 미키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반복되는 죽음과 재생을 겪는 당사자인 미키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를 관찰하는 과학자들과 우주선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무뎌진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어차피 다시 출력될 거잖아"라는 무심한 말 한마디가 미키의 존재 가치를 규정하는 듯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봉준호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 연출 덕분에 한결 편안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미키17>은 다양한 은유와 메시지를 담고 있어, 어떤 주제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가이드 삼아, 이미 보신 분들은 각자의 감상을 댓글로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 나누면 더욱 풍성한 리뷰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영화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애도받는 죽음과 소모되는 죽음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키워드는 '죽음'입니다. <미키17>에서는 애도받는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 크게 두 가지 죽음이 대비되어 그려집니다.
미키의 죽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애도받지 못합니다. 익스펜더블에 지원하게 된 과정부터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미키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채업자를 피해 니플하임으로 가는 우주선에 탑승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주선 안에서 반복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단 한 번의 죽음을 피하려다 여러 번의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영화 중반부, 티모가 미키를 죽이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도받기는커녕, 미키가 죽어야 티모가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익스펜더블 임무를 수행하면서부터는 "어차피 다시 출력될 거잖아"라는 이유로 애도는커녕 죽음으로 내몰리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사실 미키의 희생이 있었기에 니플하임 개척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니플하임에 먼저 내려 바이러스를 흡입하며 고통받았기에 백신이 개발될 수 있었고, 각종 위험한 곳을 탐험했기에 지형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인체 실험을 당했기에 그 데이터로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죽어야 하는 미키의 아이러니한 역할은 천대받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해야 마땅하지만, 극 중에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으니 죽음으로 사회에 기여한다며 오히려 천시받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 사회의 그림자와 겹쳐 보입니다. 3D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안타까운 인명 사고 뉴스는 잊을 만하면 들려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뉴스가 몇 가지씩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반복됨에도 처우가 개선되는 속도는 더디기만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손'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됩니다. 방사선에 노출된 미키의 손이 잘려나가 우주선 창문 밖으로 떠다니고 있지만, 그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3D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의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음에도,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을 무시하는 시선이 만연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영화 초반, 과학자들이 미키를 대상으로 생체 실험하는 장면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마루타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을 자행했던 그들의 모습이 미키를 통해 재현되는 듯했습니다.
애도받는 죽음을 통해 미키의 비극적인 상황은 더욱 부각됩니다. 현장 탐사를 나갔다가 얼음에 깔려 사망한 여성 요원은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애도받습니다. "왜 미키가 대신 죽지 않았냐"며 지도자인 마샬에게 쌍욕을 먹는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주변 인물들, 특히 막역하게 지냈던 카이가 흐느끼며 그녀를 추모하는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미키의 죽음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미키에게 "그게 네 직업"이라며 오히려 등을 떠밀었던 모습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미키를 죽음으로 내모는 인간들과는 달리, 니플하임 행성의 원주민인 크리퍼들은 오히려 죽음의 문턱에 있던 미키를 살려줍니다. 이 두 대비적인 상황을 통해 영화는 목숨의 경중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가 사회적 지위나 역할에 따라 차별적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영화적으로 연출하면서, 누군가는 등 떠밀리는 죽음을, 누군가는 애도받는 죽음을 겪는 상황이 비단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통제된 욕망과 끊임없는 노동력 생산
죽음과 대비되어 보이는 키워드는 '출산'입니다. 마샬은 니플하임에 도착하기 전까지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막기 위해 우주선 안에서의 섹스를 금지시킵니다. 섹스는 쾌락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생식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섹스가 금지된 우주선 안에서 미키만은 계속 '출력', 즉 출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권력층이 대중의 기본적인 욕구와 권리를 통제하면서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인간을 소모품처럼 사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는 설정으로 보입니다.
섹스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금지되지만, 노동력의 '생산'은 계속되는 모순적인 상황은 현대 사회의 노동 착취 구조를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샬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니플하임에서 자연 생식을 하려는데, 네 유전자가 가장 완벽해 보인다는 우생학적 이야기를 들은 카이가 "나를 자궁으로 보는 거냐"며 반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반발심으로 읽힙니다.
소스
마샬 부부와의 식사 자리는 여러모로 불쾌하게 그려집니다. 미키에게 포상처럼 제공된 고기는 사실 실험 중인 배양육이었고, 인간이 먹어도 괜찮은지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배양육은 자연적인 고기가 아닌 인공적인 고기입니다. 마치 자연 출산되지 않고 인공적으로 출력된 미키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마샬 부인이 이때부터 계속 강조하는 '소스'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본연의 맛을 가리는 강한 맛이라는 의미에서, 사실은 별거 없는 마샬 부부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동들을 미디어를 통해 포장하는 행태를 꼬집는 듯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소스가 유독 피와 구분이 안 되는 색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중의 고혈을 짜내 호의호식하는 기득권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최고의 소스를 찾았다면서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서 가는 장면은 이러한 해석에 힘을 실어줍니다. 크리퍼를 미국 원주민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대중으로도 해석했습니다. 마지막에 크리퍼들이 우주선 근처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소리 지르는 장면은 집회를 연상시키기도 했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의 데자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키워드 또한 읽힙니다. 마샬 부부의 모습은 특정 한국 정치인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해외 관객들은 트럼프를 떠올린다고도 합니다. 촬영 시작이 2022년 8월이었으니 각본은 그 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봉준호 감독이 각본 작업을 하면서 미래를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마샬이 지구 밖으로 이주를 꿈꾸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화성 이주를 외치는 일론 머스크도 연상됩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현시점과 겹쳐 보이는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스템의 결함과 개인의 트라우마
정치와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는 미키의 죄책감과도 연결됩니다. 미키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가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누르게 되는데, 그 타이밍에 차량이 잘못되어 사고가 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본인이 빨간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그때의 벌을 받는 것"이라며 그 상황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 빨간 버튼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지만, 부스터 버튼인지, 날개가 튀어나오는 버튼인지, 비상탈출 버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동차 사고가 난 것이 미키가 그 버튼을 누른 탓도, 어머니의 운전 미숙도 아닌 자동차의 결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개인의 잘못이 아닌 자동차의 결함, 즉 시스템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을 개인의 탓으로 생각하며 불필요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시스템의 결함이 개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말미에 미키는 꿈속에서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고통받았던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스템의 결함, 즉 지도층인 마샬 부부의 무능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꿈에서조차 소스를 먹어보라며 온갖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마샬 부인에게 미키는 "꺼져"라고 일갈합니다. 늘 주눅 들어 있던 미키17이 트라우마 극복을 통해 성장하는 순간입니다.
연대
나샤와 두 명의 미키가 나란히 침대에 눕는 장면은 영화 <챌린저스>를 연상시키며 흥미를 자아냅니다. 봉준호 감독 작품에서 쓰리썸이 등장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미키가 멀티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샤가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약에 취해 있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상상해왔던 순간이라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미키의 내레이션을 들어보면, 나샤는 늘 새로운 미키가 출력되는 순간에 그 현장에 있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력되는 미키마다 미세하게 성향이 달랐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나샤는 17명의 새로운 미키와 교감하면서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멀티플 상황에서 놀라기보다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며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는 베드신이 나오기 전의 장면입니다. 마샬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까지 온갖 인체 실험을 당한 미키를 카이가 챙겨줍니다. 그전에 이미 식당 자리 장면을 통해 카이가 미키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떡밥은 깔려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미키를 부축해서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 다음 진정시켜줍니다. 영화 초반에 사망했던 여자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죽는 건 어떤 기분이냐고 미키에게 물어봅니다.
지금까지 미키에게 같은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했습니다. 식당에서의 엑스트라도 그랬고, 티모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죽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은 정말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이의 질문 의도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즉 그 사람이 느꼈을 죽음을 앞둔 감정을 공감하며 추모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 질문과 동시에 카이가 미키의 손을 잡습니다. 앞서 노동자의 희생의 의미로 손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는데, 그 장면에서는 인간 사이의 공감과 체온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 또한 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으로 인한 희생을 보여줬던 것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손의 이미지는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사용됩니다. 생체 실험이 진행 중인 큐브 속에서 미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나샤가 큐브 속에 함께 들어가서 손을 잡아줍니다. 이 장면은 피에타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미키의 손을 잡아줬던 나샤와 카이가 극 중 인물 중에서는 인간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에 미키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눠야 한다, 즉 연대하며 감정을 나눠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종교
이 밖에도 종교에 대한 내용이나 자아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영화 속에 녹아 있습니다. 인간 존엄성과 자아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은 테세우스의 배를 생각나게 합니다.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타고 다니던 배의 모든 부품이 교체된다면, 이걸 테세우스의 배라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아니라면 어느 시점부터 아니게 되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질문만 던지고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숙제를 내준 느낌이랄까요. "영화를 보고 각자 생각해보세요!"라는 느낌입니다.
순수한 종교적인 믿음보다는 종교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꼬집으려 한다는 의도는 분명히 보입니다.
미키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는 꿈 장면에서 마샬 부인이 분명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있냐고 미키가 묻자, 마샬 부인이 "내가 진짠지 아닌지 만져보라"고 하고 손바닥에 소스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고이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이 꿈 장면 전체를 미키의 트라우마 극복을 묘사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마샬 부인의 이러한 언행에서 예수의 부활 순간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예수가 부활하는 순간을 묘사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 눈앞에 와 계신 주님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만져 봐라. 내 손과 발을 봐라.'" 먀샬 부인이 했던 대사와 동일합니다. 마샬 부인의 손에 고이는 피인지 소스인지 구분 안 가는 액체 또한 저는 단순히 권력층의 손으로 쥐어짠 노동자들의 고혈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넣은 것이 굳이 필요했나 싶기도 합니다. 이미 많은 메시지를 녹여냈는데 굳이 종교까지 넣었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제가 종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지식이 풍부하신 분들은 또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친절함과 깊이 사이
<미키17>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듯합니다.
저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은유와 메시지들이 직접적이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저처럼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내용 따라가기에 바빠서 다른 의미들을 파악하려면 머리가 깨지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친절하게 다 드러내주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해하기도 쉽고요.
하지만 봉준호 감독 특유의 치밀한 이야기 구조나 은은하게 스며있는 은유들을 좋아하셨던 분들은 다소 아쉬움을 표하기도 합니다. 해외 영화 작업만 하면 직접적이고 친절하게 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좋게 표현하면 직접적이고 친절하지만, 안 좋게 말하면 노골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서 풀어놓은 것만 봐도, 한 작품 속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것들을 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심지어 영화 후반에는 마샬 부부에게 잡힌 나샤가 직접적으로 대사를 뱉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 이야기도 해야겠고, 정치, 종교 풍자도 해야겠고, 시스템과 노동자 이야기도 해야겠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감독의 전작에서 이미 다뤘던 주제들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의 계급 우화와 시스템에 대한 풍자는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크리처를 통한 국가와 대중의 이야기는 <괴물>과 <옥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한 작품에 다 넣다 보니, 진득하게 한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얕게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관객들에게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봉준호 감독의 빛나는 연출력은 여전하다
지금까지 <미키17>에 대해 키워드 위주로 메시지들을 읽어봤습니다. 마지막에 불호 요소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이야기를 불편하지 않게 마주하게 하는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은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불호 포인트로 이야기했던 메시지가 너무 많고 얕고 직접적이라는 점은, 달리 생각하면 그냥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 그 자체만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어 영화 중에는 최고다"라는 평에 동의합니다. 아직 <미키17>을 보지 못했다면,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관객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문제적 SF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