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민낯과 우리의 일그러진 욕망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데미 무어의 커리어 최고 성과라는 평을 받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서브스턴스>를 감상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늙고 예전 같지 않은 유명인이 젊음을 되찾기 위해 의문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벌어지는 섬뜩하고도 처절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모 중심주의와 성 상품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개미친 영화"라는 홍보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기 어린 에너지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그리고 감독은 왜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제 생각을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몰락한 스타와 금지된 약물, 파멸의 서곡
먼저 <서브스턴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데미 무어가 연기한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한때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대스타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현재는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는 신세입니다. 영화는 그녀의 화려했던 과거와 초라해진 현재를 직접적인 플래시백 대신, 명예의 거리에 있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바닥 타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고 부서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세련된 연출 덕분에 영화 시작부터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다시 한번 사용되어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며, 오프닝에서 보여준 흥망성쇠의 이미지를 엔딩까지 일관되게 가져가 완성도를 높였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50번째 생일날, 방송국 프로듀서인 하비로부터 "더 이상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잔인한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게 됩니다. 깊은 충격과 절망에 빠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고, 입원한 병원에서 '서브스턴스'라는 신비한 약물을 접하게 됩니다. 이 약물은 젊고 완벽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규칙이 따릅니다. 바로 일주일마다 원래의 육신과 새롭게 태어난 육신이 교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약물을 통해 젊고 아름다운 '수'(마가렛 퀄리 분)라는 분신을 얻게 되고, 수는 곧바로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스타로 급부상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수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한 황홀경에 빠지지만,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 점점 중독되면서 위험한 규칙을 어기기 시작합니다. 과연 규칙을 어긴 그녀에게는 어떤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영화 <서브스턴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본격적인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두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 욕망의 두 얼굴
<서브스턴스>의 핵심은 단연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데미 무어와 그녀의 젊은 분신 수를 연기한 마가렛 퀄리, 이 두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육신과 새로운 육신이 가진 각기 다른 욕망과 고뇌를 두 배우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완성도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의 연기는 매우 놀랍고 강렬했습니다.
데미 무어는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 인생 최고의 아웃풋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한물간 왕년의 스타 취급을 받는 배우의 불안하고 처절한 심리 묘사는 그야말로 살벌했습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의 실제 경험과 맞닿아 있는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서 더욱 깊이 몰입하여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녀의 연기력이 특히 돋보였던 장면을 몇 개 꼽자면, 먼저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엘리자베스가 우연히 만난 옛 동창과 데이트 약속을 잡는 장면입니다. 한껏 치장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가려다가도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몇 번이고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기를 반복하다 결국 약속에 나가지 못하게 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 진짜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폭식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로 살다가 본래의 엘리자베스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극심한 자괴감과 박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장면은, 그동안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해 절제된 식생활을 하던 것에 대한 한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먹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자해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 역시 앞서 언급한 장면처럼 답답하면서도 애처로운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가렛 퀄리는 제가 이 작품에서 처음 보는 배우인 줄 알았는데,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가여운 것들>에도 출연했었더군요. 이번 <서브스턴스>를 통해 그녀는 정말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살가죽을 벗고 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수의 완벽한 몸매를 훑어 내리는데,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CG가 아닌 특수분장의 힘이었다고 하더군요.
이어서 수가 에어로빅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할 때, 카메라는 더욱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매를 비춥니다. 영화 속 시청자들은 이러한 수의 모습에 열광하고, 그 덕분에 수는 더욱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영화를 보는 실제 관객 역시 그 순간만큼은 넋을 놓고 화면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미디어가 노골적으로 여성을 성 상품화하고 그것에 열광하며 외모 지상주의를 더욱 가중시키는 모습은 영화 속 시청자들이나 그 장면에 매료되었던 실제 관객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이 느껴져 어딘가 머쓱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 외에도, 마가렛 퀄리는 점점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본체인 엘리자베스를 혐오하게 되는 과정의 미묘한 심리 변화나, 나중에 서브스턴스의 부작용으로 치아가 빠지는 등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날 때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공포를 섬세하게 표현해냈습니다.
바디 호러, 그리고 고전 영화에 대한 오마주
처음에 <서브스턴스>가 바디 호러 장르라고 했을 때, 단순히 엘리자베스의 등이 갈라지면서 수가 태어나는 과정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왜 진정한 의미의 바디 호러 장르인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주일마다 예외 없이 몸을 바꿔줘야 한다는 절대적인 규칙을, 젊고 아름다운 수의 외모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어기게 된 엘리자베스는 그 대가로 온몸의 신체 부위가 끔찍하게 뒤틀린 괴물로 변해버립니다. 그 모습은 마치 지난번에 리뷰했던 1982년작 <괴물>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흉측한 모습과도 흡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자면, 이 영화는 다양한 고전 호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싸이코>, <괴물>, <샤이닝>, <캐리> 등이 언급되는데, 저는 <괴물>과 <싸이코> 외에는 다른 작품들을 보지 못해서 아쉽게도 모든 오마주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호러 영화 팬들이라면 이러한 숨겨진 요소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미디어의 폭력성과 페미니즘 논쟁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엘리자베스는 원래 수의 모습으로 출연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쇼에 나타나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관중들을 향해 뿌리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시작에서도 등장했던 명예의 거리,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타일 위에서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관객석을 향해 피를 뿌리는 장면은 영화 초반, 방송 프로듀서 하비가 스크린을 향해 소변을 보는 장면과 겹쳐 보이면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엘리자베스가 뿌리는 피를 뒤집어쓰는 극중 관객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하비의 오줌 세례를 받는 듯한 불쾌감을 느껴야 했던 실제 관객들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미디어가 강요하는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폭력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극중 엘리자베스와 수의 무력한 심정을 관객들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된 연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투자자들과 하비가 수를 향해 "여자는 웃어야 한다"며 웃음을 강요하는 장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는 자신의 몸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그들의 말에 저항하지 못하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여야만 했습니다. 이는 영화 초반의 엘리자베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비에게 모욕적인 언어폭력을 당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영화는 미디어에 의해 강요당하는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폭력을 매우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브스턴스>를 페미니즘 영화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현재 왓챠피디아 같은 영화 커뮤니티에서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적 해석을 두고 사용자들 간에 뜨거운 댓글 논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작품에 페미니즘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만'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기보다는, 페미니즘적인 시각 '도' 담고 있는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는 분명 여성에게 아름다움과 미소를 강요하는 미디어와 대중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그 아름다움과 미소를 통해 부와 명예를 얻고 허영심과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 여성들의 모습 또한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끔찍한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도, 젊고 아름다운 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고자 했던 그녀 자신의 그릇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원래의 모습인 엘리자베스일 때도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이거나, 젊고 아름다운 수의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고 폭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성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대중의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 그리고 여성성을 상업화하는 사회 구조 때문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맥락의 문제라서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이 더욱 길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영화가 이러한 논쟁을 벌이는 관객들마저 풍자해 버리는, 일종의 '모두까기'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외모 지상주의 풍자와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풍자라는 측면에서는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되었던 <성형수>라는 작품도 떠올랐습니다. <성형수>는 특수한 용액을 이용해 피부를 마치 찰흙처럼 다시 빚어 새로운 외모를 만들어낸다는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작품 역시 주인공이 자신의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성형수를 사용하는 바람에 결국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브스턴스>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외모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파멸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디어에 의해 극단적으로 조장되고 강화되는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어쩌면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진행하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의 엔딩 멘트는 항상 "나 자신을 사랑하세요"입니다. 또한, 서브스턴스를 제공하는 익명의 존재가 엘리자베스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말 역시 "본체와 분신은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본체인 엘리자베스와 분신인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서로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는데, 이 둘은 사실상 하나의 존재이므로 이는 곧 자기혐오로 귀결됩니다. 나이 들고 외모 경쟁력이 떨어진 현재의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젊고 예뻐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 이 두 가지 파괴적인 감정이 서로를 잠식하면서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결국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라는 위험한 약물에 손을 대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현재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장치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이 사용되었지만, 이를 현실에 대입해 보면 미용 목적의 성형 수술이나 각종 시술 등으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료 목적이 아닌 순수한 미용 목적의 성형 수술이나 시술을 선택하는 경우, 대부분은 현재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 한두 번의 시술이나 수술은 만족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영화 속 엘리자베스처럼 점점 더 완벽한 외모에 대한 갈망에 중독되기 시작하면, 결국 성형 중독으로 이어져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끔찍한 괴물처럼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영화는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얼굴을 공개하고 콘텐츠 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종종 댓글을 통해 외모에 대한 공격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더라도, 굳이 얼굴을 공개하고 방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얼굴을 공개하면서 콘텐츠 활동을 하는 것은, 제가 구독자들을 끌어모을 만큼 대단한 외모를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제 라이브 방송에 오시는 분들과 좀 더 가깝고 진솔하게 소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전형적인 미남형은 아니라는 것을요. 하지만 저는 미남형이 아니더라도 제 현재의 외모가 좋습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브스턴스>는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쉬운 점과 총평
지금까지 좋았던 점과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해 봤는데, 단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니 사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굳이 한 가지 꼽자면, 엘리자베스와 수가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발로 한 번 찼을 뿐인데, 엘리자베스가 마치 격투 게임 캐릭터처럼 뒤로 멀리 붕 날아가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런 초현실적인 약물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현실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 장면은 조금 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과장되게 날아가지 않고, 발로 차여 계단에서 구르는 정도로만 연출했어도 충분히 상황이 설명되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또한, 바디 호러 장르의 특성상 징그러운 시각적 연출이 상당히 많다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연출들이 영화의 주제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장면에 익숙하지 않거나 불쾌감을 느끼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으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될 정도니까요. 잔인하고 징그러운 장면을 잘 못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분들은 애초에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리하자면, <서브스턴스>는 어쩌면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바디 호러라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장르를 빌려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바디 호러 장르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