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근길 멍을 때리다가 문득 어제 본 영상이 떠올랐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때의 영상이었다. 벌써 26년이나 되었다니 시간의 흐름에 새삼 경이감을 느끼게 된다.
그 즈음에는 유독 큰 사고가 많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도 1995년이었다. 피해자는 수십수백인데 가해자는 없는 사건들이었다. 이기적인 어른들이 겉만 번지르르한 경제성장의 산물을 지어내고 그 부실공사의 대가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의인들을 추켜세우고 악마 같은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워 진실에 대한 눈을 가렸다. 정작 부실공사로 많은 목숨을 빚지게 한 당사자들은 벌을 받았을까.
지금의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슨 짓을 하는 중인가 생각해보면 아직 아기인 친구의 아이가 능숙하게 마스크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아침마다 엄마보다 먼저 미세먼지를 체크해 오늘 놀이터에 놀아도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고 한다.
평생을 마스크 한 번 쓸까 말까 하다 최근 몇 달 사이에 겨우 마스크를 받아들인 나도 마스크가 없는 세상이 어색한데, 태어날 때부터 마스크를 쓰고 살아온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생각의 말미쯤엔 아이들의 고향이 아파트라는 광고가 떠오른다. 아이들의 할머니 집은 더 이상 시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너는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 주택에 사는지 재고 따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곳도 아파트고 할머니 집도 아파트인 아이들에게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는가. 거기에 다름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시스템과 부모의 편견이 더해지면 앞이 캄캄해진다.
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동네 뒷동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원래 내가 거기에서 어떻게 놀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추억의 장소조차 사라졌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고 내가 우리의 아이들의 나이었을 때와 지금의 아이들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더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약간 방황의 시기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를 벗어났다고 뭔가를 크게 더 하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전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몽롱하게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글이라 하기는 뭐 하지만 나름 한때 유행했던 팬픽을 쓴 게 마지막 장문의 글을 썼던 때 같다.
그때는 무언가를 보고 나면 그것을 카피해 글로 쓰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드라마도 좋고, 영화도 좋았다. 특히 만화책을 좋아했는데 그림을 그렸으면 그림으로 그렸을 텐데, 그림을 못 그려서 장면 장면을 글로 썼던 것 같다. 내 글에 만화를 보는 느낌이라는 코멘트가 달린 걸 보면 뜨끔했다.
후우- 하고 입김을 불자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 연기들 사이로 그리운 얼굴이 함께 피어올랐다 흩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그런 글쓰기 습관은 독이 되기도 했다. 카피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쉬운 것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못하고 글 쓰는 것을 그만둔 일이었다. 긴 글을 점점 멀리하고 만화책도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을 때, 멍청해지는 건 어떤 것보다 쉬웠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웹 소설 장르는 아직 제대로 읽은 건 없다. 읽으려고 시도는 몇 번 해봤는데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읽는 것도 쓰는 것도 1단계부터 다시 학습해야 할 판이다. 거기다 요즘 쓰는 방법과 소재가 옛날과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절망적이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해 잠시 눈 돌리는 사이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멈춰있었다. 지금 라떼세대로 분류되는 어른들이 라떼 찾는 걸 이해한다는 건,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너무나 공감이 된다.
시대를 따라 허덕이며 변해야 할지 라떼를 읊더라도 내 방식을 고수해야 할지 기로에 서있다. 기로에 서있다고는 하지만 이러다가 그냥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삭제할 수도 있다.
하아, 뭐하나 쉬운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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