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플렉스, 콤플렉스 그리고 글쓰기의 관계

글쓰기를 시작하는 당신에게, 나의 이런 작은 도전이 위로가 되길 바라며

by 글쓰는보리


내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보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생(사실 나는 마지막 국졸 세대다 ㅎ) 시절의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 그 자체였다. 첫 번째는 목소리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후 더 있겠지만 생략.


출처 : pixabay.com


목소리가 우리 할머니 같아.


살면서 천 번쯤, 아니 만 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흔한 인사인 "밥 먹었니?"보다도 더 많이 듣던 말이었다. 동급생에게 처음 저 말을 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부천에서 인천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전학 간 학교에서 들었던 말일 것이다. 그전에도 그런 말들을 들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까지 충격은 아니었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때 이후로 나는 입을 다물었고 책은 많이 읽지만 발표는 하지 않는 어린이가 되었다. 어릴 때의 기억은 몇몇 큰 사건 말고는 거의 기억이 없는데 얼마나 내가 말을 하지 않았냐면,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수업 시간이었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왕은 한 사람이지만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야 했기에 직접 하지 못하고 어진 사람을 뽑아 각 지방에 내려보내 살피게 했다고 했다. 그들의 직업은 사또. 그런데 그 사또들 중에 잘하는 인간도 많지만 물욕에 눈이 멀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사또도 많아 그들을 또 감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왕, 영의정, 좌의정 등등 말고는 처음 듣는 직종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시 '어사 박문수'라는 책을 감명 깊게 봤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그 직종을 '암행어사'라고 했다.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들떠있던 나는 암행어사 중 알고 있는 인물이 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처음으로 손을 번쩍 들어 대답했다.


"어사 박문수요!"


5학년 학교생활 중에 첫 '자진'발표였다. 시키는 발표마다 자신 없는 목소리였고 3학년 이후 아이들의 비웃음을 살 때마다 몰래 울어야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자신 있게 내뱉은 말이었다.


"어, 맞아... ㅇㅇ이 말할 줄 아는구나. 자폐아인 줄 알았는데."


그전에 친구들이 했던 말들이 화살 혹은 돌멩이였다면, 그때의 선생님은 말은 사람이 혼자 들 수 없는 아주 큰 바주카포였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에게, 심지어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난 아직도 그날의 교실 풍경이나 술렁거리던 공기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 할머니 목소리를 가진 ㅇㅇ이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말은 없지만 건들면 주먹을 휘두르며 아주 난폭해지는, 폭력적인 아이가 되었다. 목소리로, 이름으로 수도 없이 놀림을 당했지만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끔 그날을 떠올리곤 한다. 그날, 그 선생님이 그런 아무 말이 아닌 그저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였으면 나는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을까.



너는 연예인 중에 누구 좋아해?


암울했던 초딩시절을 마치고 질풍노도의 시작 중학생이 되었다. 학교가 아예 바뀌었기에 나란 존재는 말 없는 학생1의 존재였다. 그럼에도 관심이 필요한 시기였기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말하기 대신 쓰기였다. 말하기 듣기 쓰기 언제나 붙어 다니는 3종 세트 아니던가.


당시 영화 <약속>, 소설 <남자의향기> 같은 조폭로맨스가 유행했고 중학생임에도 큰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류(?)의 책을 구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불어 유행한 장르가 불치병로맨스였다. 초딩 때부터 이미 덕후의 기질이 있던 나는 대중가요,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다양한 장르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소통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는 모르겠다. 친구와 친구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우리가 보던 장르의 소설을 내가 직접 공책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공인 그 친구에게 더 친해지기 위해 선물로 주었고, 그 친구의 짝꿍과 앞뒤에 앉은 친구들에게 그 공책이 읽히기 시작했고 급기야 옆반 친구들에게도 공책이 옮겨지기까지 했다.


살면서 처음 받게 된 놀림이 아닌 긍정적 관심이라 신기했고 나름 머리를 써 친구들에게 맨 뒤에 빈 페이지를 남겨둘 테니 감상문도 써달라고 했다. (이게 내 기억 조작인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의 친구들과 모조리 연락이 끊겨 그 시절의 내가 어땠는지 추억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대학시절쯤 우연히 연락이 닿았던 그 시절 주인공이었던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난 니가 지금쯤 MBC아카데미에 갔을 줄 알았어."



뭐라도 읽고, 뭐라도 쓰기로 했다.


방송작가가 꿈이었지만 어중간한 성적이었던 내게는 너무 큰 산이었고 도움도,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대학 이름이나 취업이 중요했던 시절이니, 이름도 생소했던 문예창작과나 취업도 안되던 국문과, 철학과 진학상담을 해주는 선생님도 당연히 없었다. 겨우 건너건너 알아본 예대 문창과 실기 한 번 치러본 것이 나의 가장 큰 도전이었고 첫 실패였다. 그 이후로는 당시 취업전망이 좋았던 대학을 가야 했고 취업해야 했고 계속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살아내다 보니 책은 멀어졌고 글을 쓰는 행위 역시 점점 멀어졌다. 작가가 되고 싶다던 꿈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작가는 가난하다'라는 편견(?) 때문에 선뜻 잘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작가의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겸업을 했어도 됐을 일이다.)


궁색하게 변명을 좀 더 해보자면, 책을 다시 읽고 싶다는 욕망은 거의 1년째 키워오고 있지만 여전히 잘 실행하지 못하는 중에 있다.


다시 글쓰기를 결심한 이유도, 월급 받기 위해 하는 행위 외의 다른 행위들로 나를 찾고 스트레스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바느질만으로 나를 찾기에는 한계에 달했고 뜻하지 않은 코로나 휴가는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사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며 받은 충격도 한둘이 아니었다. 한글 40장 내외도 3일 만에 쓰던 사람이 나였는데, 지금은 단 몇 자 쓰는 것조차 버거워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퇴화되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거기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인가. 똑똑한 사람도 왜 이리 많고...? 나만 바보인건가...?! 자신감 역시 제로에서 마이너스로 바뀌어버렸다.


그럼에도 쓴다는 것은, 기록을 한다는 것은 흔들리는 나를 잡기 위한 행위이고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타인과 나의 소통을 위한 창구를 만드는 일이기에 이번에는 부디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첫 실패에 좌절하고 더 나아가지 못했던 19살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아마도 무엇이든 다시 쓰기로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