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고무장갑

아무렴 고수는 말이 없는 법이다

by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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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일없이 마트를 구경하던 나는 웬 고무장갑에 매료되었다. 요란한 핫핑크 고무장갑 사이에서 홀로 고고한 터키석 색 장갑은 투명한 비닐에 밀봉되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곱게 반으로 접힌 채였다. 비닐 표면에 붙은 작고 하얀 딱지는, 항균 작용을 한다느니 천연고무니 하는 수작 없이 단 네 단어만을 명시했다. 클린케어. 그린 글러브.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사이즈 M.


이토록 말을 아끼는 고무장갑은 처음이었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허용치 않는 이 장갑의 간결함과 깨끗함은, 과장을 좀 보태어 수술실의 멸균 장갑을 상상하게 했다. 이것을 끼면, 설거지나 청소 따위의 너저분한 루틴도 청결을 구하는 경건한 의식이 될 것이었다. 나는 과욕이라고는 모르는 고무장갑의 기품에 홀린 대가로 7천 원의 값을 치렀다. 여느 제품의 서너 배쯤 되는 값이었으나 매일같이 쓰는 물건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참으로 가뿐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미세한 긴장 속에서 이 장갑의 포장을 뜯고,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7천 원이라는 값을 그야말로 ‘체감’했다. 미끈거리고 착잡한 고무 나부랭이가 아닌, 보드라운 코튼 안감이 산뜻하게 손을 감쌌다. 얇고 탄탄한 천연 라텍스는 수전 위든 싱크대 모서리든 ‘착’ 걸쳐져 보기에도 좋았다. 나는 이 얌전한 장갑을 더 알고 싶어 웹을 뒤졌으나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출처에 대한 의심은커녕,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손을 넣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렴 고수는 말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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