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의 독서
한 줄 소감 :
일과 가정 모두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도 육아도 너무 힘든데 원인이 뭔지 궁금하다면
흔히 성공을 위해선 워라밸 박살을 기꺼이 감내하고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이것이 (가정을 내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방식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위해선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컨셉에는 동의하지만, 맞벌이를 하는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더 이상 취할 수 없는 스탠스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일과 가정이라는 인생 최대 과업을 동시병행하며 그 둘을 빠짐없이 챙긴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지금 육아휴직 중인 아내가 곧 복직을 앞두고 있는데, 아이의 어린이집 등하원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이 캄캄하다. 내가 연이어 휴직을 하자니, 평소의 반토막도 안 될 월급에 당장의 대출원리금이 걱정이다. 그렇다고 아내와 맞벌이를 하며 어린이집 종일반에 아이를 맡기거나 돌봄서비스를 사용하자니, 내가 내 손으로 키우겠다고 낳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게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아이에게 참으로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찾아든 책이 이 책이다. 저자는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종신 교수로서 남녀의 임금 격차 원인이 무엇인지를 주로 다루는데, 이를 공로로 2023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와 상황을 토대로 쓰였기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완전히 와닿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현 한국사회가 겪는 문제, 특히 저출산 및 돌봄의 문제는 우리나라와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골치 아파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책에서 다루는 전반적인 문제의식과 결론은 한국사회에도 매우 잘 적용된다. 책은 대체로 논문 형식을 띠고 있긴 한데, 후반부로 갈수록 재밌어진다.
이 책은 남녀 임금 격차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맞벌이를 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 사회초년생 시기에 일에 많은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하한다(여기서 커리어와 단순 일자리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 특히 대졸 이상은 자신만의 커리어 달성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와 출산의 시기가 하필 딱 겹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반드시 부모가 가진 가처분시간의 큰 비율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부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부부 둘 다 커리어와 소득을 잠시 내려놓고 공평하게 가정에 시간을 더 쏟을지, 아니면 한 명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고 나머지 한 명이 몸과 시간을 갈아 돈을 벌지를 말이다.
대부분이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돈 버는 건 남자가 좀 더 고생해서 벌고, 가사와 육아 전담은 대부분 여자가 한다. 여기까지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현실이므로(그리고 나와 아내 또한 현재 이러한 시스템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별다를 게 없었는데, 그 이유와 해결방안이 정말 색달랐다.
부부간 공평성을 추구하지 않고 육아와 경제활동을 각각 도맡아 특화를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젠더 고정관념 때문에? 난 이것이 원인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은 그냥 젠더 관념에 따른 현상일 뿐이었다. 부부간 공평성이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회사일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온콜(on-call) 상태를 유지하며 직장에서 발생하는 돌발상황들, 고객의 까다로운 요구, 야근 등을 떠안으면 회사는 기존 시급에 프리미엄을 얹어준다(책에서는 이러한 일을 '탐욕스러운 일 greedy job'이라고 표현한다). 가정을 위해 유연하게 근무하며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면 회사의 중책을 맡을 수도 없게 되어 커리어가 점점 맹탕이 되고 프리미엄이 붙은 시급을 받을 수도 없으니, 부부는 경제공동체로서 합리적으로 이득이 되는 방안을 택한다는 것이다. 즉, 부부의 공평성을 추구하는 것은 아주 값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선택이므로, 한 명이 육아를 전담하고 한 명이 탐욕스러운 일을 전담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젠더 고정관념에 따라 보통 남자가 일을 하고 여자가 육아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가정마다의 이러한 선택(육아를 떠안는 것은 보통 여성이고, 그에 따라 여성은 경력이 단절되고 낮은 임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남자는 돈을 버느라 바빠서 가족과 멀어지게 된다)이 모이고 모여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낮은 임금이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말 놀랍고도 새로운 통찰이다. 이 통찰을 이끌어내고자 저자는 미국 여성의 노동역사와 각종 통계를 가지고 와서 세세하게 근거를 대며 설명을 이어간다.
저자는 직군별로 나타나는 남녀 임금 격차를 보여준다. 종사하는 업계가 ‘대면 업무’가 많고 ‘시간 압박’에 시달리는 업종일수록 직장의 온콜 요구는 커지고, 이에 따라 위에 적은 논리대로 부부간 공평성은 택하기 어려운 옵션이 되며 결국 사회적으로는 성별 임금 격차까지 불러온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부부간 공평성을 위해선 직장에서 완벽히 대체 가능한 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내 업무가 대체될 수 있는, 노동과 기술이 상호 교환 및 호환 가능한 직종이야말로 가정과 커리어를 동시에 추구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업무가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하기 힘들거나, 시도 때도 없이 회사에서 전화가 오거나, 출퇴근이 예측이 안 될 정도로 바쁘고 불규칙하다면 나의 동료가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워라밸을 뭉개며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된다면 가족과는 멀어지게 된다. 가족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존재인데 말이다.
일단, 이 책에서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자리가 아니라 인생 내내 쌓아 올리는 커리어를 다루기 때문에, 고학력자를 요하는 기업 내지 전문직 등을 주로 언급한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만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다.
상호 대체 인력이 되기가 힘든 이유들 중 하나는 일의 책임소재를 따져야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인 듯하다. 담당 업무를 누가 처리했는지를 콕 집어야 하는 순간에, 서류의 작성 명의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찾아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업무(또는 프로젝트)의 호흡이 길 경우 대체 가능함과는 더욱 멀어진다. 수학 내지 화학 공식처럼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의 체계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 종사자 개개인의 논리전개와 아이디어나 인맥으로 복잡한 일을 풀어나가거나 조합해 나가는 직종의 종사자들은 상호 대체가 힘들 것이다. 결국 이과가 짱인 것인가..
그리고 사측을 설득할 만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상호 대체 인력이 가능해지려면 일단 하나의 업무에 두세 배의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혹은 대체 인력으로 투입되는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경영진 입장에선 돈과 인력을 아끼기 위해 이를 꺼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호 대체가 가능한 직종은 대부분 임금이 높지 않다. 임금이 높지 않으면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결국 가족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결혼과 출산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도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타인으로부터 대체가 가능하면서도 고소득이 가능한 직종, 또는 재택근무와 같이 시간의 유연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직종을 고르는 것이 개인 입장에서는 최선책이다(이 책에서는 약사를 예로 들고 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이 제일이겠으나,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내 맘대로 적게 일할 수 있거나, 적게 일하더라도 먹고 살 만치는 벌 수 있거나, 복직하더라도 불이익이 없거나 적은 직업이 개인과 가정에게는 지속가능한 직업이다. 물론 이런 직업이 몇 안 된다는 게 문제지만.
이 책이 나의 취준생 시절 때 출간되었다면, 나의 직업 선택과 가정생활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텐데.. 여하튼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다. 아래는 챕터별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1.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문제
- 돌봄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큰 고민거리.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키우고 싶은데 커리어도 쌓고 싶다.
- 과거에 비해 노골적인 성차별은 찾기 힘들어졌다고 해도 성별 간 임금격차는 여전하다. 이 격차는 결국 커리어 격차에서 비롯된다.
- 대졸 여성은 가정과 커리어 둘 다 가져가고 싶어 한다. 커리어를 위해선 젊을 때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야 하는데 아이 갖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 배분의 문제인 것이다. 잔인한 타이밍이다. 가족 관련 온콜 문제를 누가 떠안을 것인가?
- 보통은 여자가 떠안는다. 남녀 둘 다 떠안으면 좋지만 소득 문제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이것이 성별 소득격차의 이유. 남자도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 노동 구조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유연한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2. 바통을 넘겨주다
- 옛날엔 성공한 여성은 결혼을 안 했다. 반대로, 결혼을 한 여성은 커리어가 없었다.
- 그간 여성들의 노동의 역사를 보면, 일자리 먼저 얻고 가정을 꾸리거나, 가정을 먼저 꾸리고 일자리를 얻거나,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고 그다음에 가정을 꾸려왔다.
- 이제는 둘 다 한 번에 가져가려고 한다. 피임과 시험관 시술 등의 발전으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됨.
-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3. 두 갈래 길(결혼하거나 성공하거나)
- 20세기 전반 미국에선 기혼여성의 고용이 제약받았다. 결혼하면 퇴사시키기도 함. 부부가 동일한 기관이나 기업에서 일 못 하게 하는 가족 채용 금지 규칙도 있었음.
- 가전제품이 없어서 가사노동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동이 매우 컸음
-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정에서의 역할이 컸음
- 따라서 대졸 여성 전체에선 50프로가 무자녀, 성공한 대졸 여성에선 70프로가 무자녀(무자녀인 이유는 결혼 자체를 안 해서임)
- 성공한 여성들 중에는 학자, 저널리스트, 변호사, 예술가가 많았다. 학계와 교직엔 기혼여성 고용제한이 있었기 때문.
4. 중간 다리 집단
- 전기와 가전제품 도입으로 가사노동에서 일정 부분 해방
- 화이트칼라 직종의 증가로 여성 시장진출 확대
- 이에 따른 교육 수준 상승, 고등교육 보급 확대
- 그러나 대공황 이후 기혼여성 고용금지 정책이 불면서(일자리 분배를 위해 부부 중 남편만 일하라고 강제함) 교육받은 기혼여성의 일자리 제한
5. 베티 프리단이 틀린 것과 맞은 것
- 과거에는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며, 그렇지 않고 일을 하러 밖으로 다니면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분위기가 있었음.
- 근데 양질의 어린이집이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임.
6. 조용한 혁명
- 경구피임약으로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됨
7. 혁명을 보조하는 보조생식술
- 인공수정과 시험관으로 30대 중후반의 커리어 우먼들도 아이를 갖게 됨
- 근데 문제는 사실 시간 제약이었음.
- 대졸 여성 중 아이가 있으면 종일 직장을 가진 여성의 비율이 절반으로 줄어듦.
- 아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부부간의 공평성은 정말 비싼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별 소득 격차가 사라지지 않는 것.
8. 사라지지 않는 격차
- 과거엔 많은 기업이 성별에 따른 직종을 제한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면 불법
-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성별에 따른 주요 직종은 구분된다(간호사, 트럭기사 등). 사고실험을 통해 이러한 성별 분포를 직종마다 같아지게끔 해본다고 해도, 성별 소득 격차를 1/3밖에 줄이지 못한다. 직종 내에 그냥 성별 소극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
- 왜일까? 두 가지 주요 요인이 있는데, 경력단절과 노동시간의 차이이다. 그리고 경력단절이나 적게 일하려는 사람에게는 불이익이 가도록 기업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경단이 길고 노동시간이 짧은 이유는 출산과 육아 때문이다.
- 좋은 의도에서의 가부장주의(육아하는 직원을 배려해 주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 배제시켜 주는 등)가 작동하여 일터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성 스스로가 경단과 짧은 노동시간을 선택했다. 최강 복지를 자랑하는 북유럽 국가들도 부부간 소득격차는 컸다.
- 직군 별로 소득격차의 차이는 크다. 변호사처럼 자기 고용을 하는 전문직, 금융, 판매, 행정, 경영은 격차가 컸다. 수학, 과학, 공학, 의료(의사 제외)는 격차가 작다.
- 이러한 차이는 직군별 노동의 특성 때문이다. 타인과의 접촉, 의사결정 빈도, 시간압박, 업무의 사전 구조화 정도, 인간관계 유지, 경쟁 -> 이 여섯 가지가 소득격차의 원인이다. 특히 경쟁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모두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 공학 과학 컴퓨터 수학 분야는 시간 관련 요구사항이 덜하고 사람들과의 상호작용도 적다. 이런 직종은 성별 소득 격차가 적다.
- 경영 행정 판매 전문직 등은 대면업무가 많고 시간압박에 시달린다. 성별 소득 격차가 크다.
- 보건(물리치료 영양치료 등)은 대면업무와 시간압박이 큰데도 업계 내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성별 소득 격차가 적다.
- 금융 오퍼레이션(금융자문, 대출상담, 보험설계 등)은 시간 압박이 적은 편이지만 업계 내 경쟁이 치열해서 성별 소득 격차가 크다.
- 가정에서의 온콜을 책임지는 사람은 대게 여성이다. 이를 위해 여성들은 시간사용이 유연하고, 내 일이 타인에 의해 대체 가능하고, 노동이 표준화 및 루틴화 되어있는 일자리를 선호하게 된다.
- 남자는 장시간 일을 하고 돈을 더 버는 쪽을 담당하게 된다. 클라이언트는 자신의 담당자가 중간에 바뀌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 부부가 육아책임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그리고 일터에서 유연성을 추가하는 것에 따라 지불해야 할 금전적 비용이 얼마인지가 애 키우는 부모의 의사결정 요건이다. 지불해야 할 대가가 크면 공평성을 포기하고 한 명이 몸 갈아서 돈을 벌고 한 명이 독박육아에 전담하게 된다.
9. 변호사와 약사
- 노동 구조 자체가 문제다. 시간을 얼마나 쏟아붓느냐가 임금의 차이로 이어진다.
- 변호사를 예로 들어보자. 부부가 둘 다 능력 좋은 변호사여도, 아이가 생기게 되는 순간 고용변화를 피하지 못한다. 특히 코로나 때는 아이를 보낼 기관도 문을 닫아서 부부 중 한 사람은 육아에 전념해야 했다.
- 아이에게 쓰는 시간은 고객에게 쓰지 못한다.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과 집안일 시간은 회사일에 쓰지 못한다.
- 이런 경우 보통 부부의 소득을 최대화하는 결정을 내린다. 한 명은 일을 줄이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린다. 다른 한 명은 가정의 의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일에 시간을 쏟는다. 이 경우 압도적인 비율로 전자를 여성, 후자를 남성이 맡는다. 왜 애초에 여성이 집을 선택하는지는 젠더 규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 일이 불규칙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가고, 고객과의 시간이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직군은 시간당 임금이 매우 높아진다. 이 추가 보수는 직원이 고통을 감내하게끔 회사가 지불하는 비용이다.
- 이것은 개인 혹은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스템의 문제다. 고객과의 모든 일을 챙기도록 되어 있는, 이에 따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의 구조가 문제다.
- 근데 약사는 다르다! 과거와 달리 약사의 업무는 약사 개개인의 고유성이 희미해지게 되었다. 고객 개개인별 맞춤 처방이나 야간 긴급 처방과 같은 개개인에 대한 서비스는 이제 거의 하지 않는다. 특정한 세무사나 변호사가 하나의 사건을 쭉 맡아서 해결해야 하는 것과는 다른 것.
- 독립 약국의 비중이 줄고 기업 소속 약사가 늘어났다. 약들은 표준화되었고, 정보기술 발달에 따라 모든 고객이 복용하는 모든 처방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환자와 약사의 일대일 상호작용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 이 결과, 약사들은 서로의 업무를 쉽게 대체하고 대신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전문직으로서 고소득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완벽한 대체 인력이 되어기에 추가 노동시간에 대한 프리미엄은 줄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별 소득 격차도 줄고, 파트타임 노동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짐에 따라 경력단절도 문제 되지 않는다. 요구사항이 많은 까다로운 고객, 긴급한 회의, 야근 등이 있어도 나를 대체할 동료가 있다면 ‘시간 요구의 밀도’는 낮아진다.
- 한 가지 포인트는 약사 직군에 여성이 많이 유입되어서가 아니라는 것! 약사 직군의 노동환경과 업무시스템이 변화하여 생긴 현상이라는 것!
- 즉, 급할 때 내 일을 맡아줄 완벽한 대체 인력이 있냐 없냐가 매우 큰 함의를 가진다. 모든 직군이 약사와 같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
10. 온콜
- 직장에서의 온콜을 떠안는 직원은 임금이 높다. 온콜에 대한 시간외수당에 프리미엄이 붙으면 부부는 가정과 회사를 두고 분업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가정 온콜, 남성이 직장 온콜을 맡게 된다.
- 감수해야 하는 소득 손실이 크면 클수록 직장 온콜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렇게 가정에서 부부간 공평성이 훼손되면 일터 및 사회에서의 공평성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 요즘 젊은 남녀 모두 직장에서의 유연성을 최고의 추구 가치로 뽑는다. 이러한 환경을 가지기 위해 이직하거나 부서를 옮기는 것은 두 발로 투표를 하는(의사표시를 하는) 셈이다. 높은 임금 대신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
- 여러 직군에서의 여성 종사자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유연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기도 한다.
- 온콜을 요구하는 탐욕스러운 일에 대해 높은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부부가 이를 선택할 확률이 줄어들 것이고 여성의 경단이나 임금격차 또한 줄어들 것이다.
- 육아 비용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돌봄서비스 확대, 방과 후 및 방학 프로그램 지원, 노년층 돌봄 정책 등이 많이 필요하다. 오늘날 돌봄 영역과 경제 영역은 명백히 상호의존적이다.
- 남녀의 고정된 역할 때문이라 생각하여 남녀의 역할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부부간 시간 배분의 문제는 항상 똑같이 주어진다.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다.
11. 에필로그
- 여성들이 커리어, 가정, 공평성을 달성하려면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동일한 것들을 회사에 요구해야 하고, 여성들이 일터에서 더 많은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남성들이 집에서 더 많은 책임을 맡아야 한다.
- 부부가 가정생활을 번갈아 리드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