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엑시트』 독후감

2025년 11월의 독서

by 야간선비
한 줄 소감 :
게임플레이가 어려운 이유는 내 실력 탓도 있지만 맵 탓도 있다는 것


『오픈 엑시트』, 이철승 지음, 문학과지성사, 2025


이 책을 알게 된 건 몇 달 전 정희원 교수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였다. 이 책의 저자인 이철승 교수가 해당 유튜브 채널에 게스트로 나와서 한국 직장인들의 현실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내용이 꽤나 흥미로웠다(https://youtu.be/s-viS5LKc8w?si=KfzR2j_ZczxmCRU1). 해당 영상의 토대가 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번 독서를 계기로 책의 저자 이철승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는 '대한민국 사회의 불평등'이라는 주제로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바 있는, 잘 알려진 학자였다. 책 자체도 말랑말랑한 문체로 쓰여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근간이 되는 개념은 바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를 기반으로 한 나라'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개인이 아닌 조직화된 집단의 노동력을 장시간 투하해야 하는 벼농사를 해오며 먹고살았다. 그것도 산간 지형에서 말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같은 일을(그것도 육체적으로 아주 고된 일을) 해야 하는 만큼 일사불란해야 하므로 서열과 연공제가 자연스레 굳어지게 된다. 경험이 많은 고령일수록 대우를 받게 되는 동시에 실질적인 노동은 하지 않고 관리감독을 주로 맡게 된다. 쌀이라는 식량이 주는 풍부한 영양소는 벼농사 외에 다른 대안적 식량을 애써 찾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이 논두렁에서 개인들은 생존을 위해 위계질서 안에서 서로를 비교하고 감시하고 조율하고 경쟁하게 된다. 옆사람과 발을 맞추어야 하고,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너무 굼떠서도 안 되고, 눈치를 기반으로 한 일머리가 있어야 한다. 어라? 난 벼농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이 모든 것이 익숙하다.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그리고 내가 지금 직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벼농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니.


이렇게 상하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내부 노동시장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대한민국 직장인은 탈출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탈출은 쉽지 않다.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 상태의 적국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대한민국은 사방이 완전히 고립된, 단 5천만명짜리 작은 단일 노동시장이다. 이러한 작고 동떨어진 시장에서만 몸을 담고 있던 개인이 다른 곳으로 쉽게 발을 뻗을 순 없다. 한류의 바람을 타고 한국어가 아무리 널리 퍼졌다 한들 쉬이 통용되는 언어도 아니다. 유럽 국가처럼 영어나 제2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경우도 드물고 이를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시키지도 않는다(물론 영어 교육열이 엄청나긴 하지만 대한민국 영어교육은 입시영어일 뿐 자유로운 프리토킹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기업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니, 인생살이가 쉽지 않은 게 내가 못나서일 수도 있지만 애당초 내게 주어진 대한민국이라는 맵 자체가 너무 빡세다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이런 사실이 묘하게 위안을 준다).


이러한 물리적인 폐쇄성에 더해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한국 특유의 사회적 문화적 틀을 저자는 소셜 케이지social ca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나 집단, 조직을 탈출하고자 할 때 이를 좌절시키거나 단념시키는 '심리적-제도적-환경적 장벽', 즉 내가 현재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이탈하지 않고 지금 자리에 머물도록 만드는 생태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인센티브 메커니즘과 제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케이지라는 개념을 놓고, 한 개인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득세하는 이 시대에 동아시아 노동시장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돈을 쏟아부어도 나아지지 않는 저출생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지,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이민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책의 제목이 오픈 엑시트인 만큼, 저자는 철장을 활짝 열 것을 촉구한다. 저자는 개인을 위한, 사회를 위한, 국가를 위한 오픈 엑시트 옵션을 하나하나 제안한다. 저자의 제언은 어찌 보면 책에서나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대단히 이상적이고 상투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다고 토로하는 요즘, 극심한 저출생으로 대한민국의 서버종료가 예고된 요즘, 이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현실에 반영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개개인의 삶에는 물론, 정경사문 모든 분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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