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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독후감

2025년 4월의 독서

by 야간선비
한 줄 소감 :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육아 난이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자식 사랑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지음, 글항아리, 2008


아내가 <양아록>이라는 조선시대 서적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조선 중종과 명종 때의 이문건이라는 선비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손자를 키우면서 작성한 것인데, 즉 할아버지가 쓴 육아일기다. 조선시대에, 그것도 할아버지가 작성한 육아일기라니 이보다 더 흥미로운 컨셉은 다시없을 것이다. 독서 구미가 확 당기는 것이 도저히 읽지 않고서는 못 배기지 않겠는가.


이 책은 <양아록>을 가지고서 엮은이가 나름의 편집과 재구성을 거쳐 만든 작품이다. <양아록>의 실제 내용과 저자 이문건의 생애 당시 역사적 상황을 토대로 읽기 쉽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묘사화 전후의 조정 분위기를 비롯하여 각종 배경지식들도 곁가지로 끼워져 있다. 다만, 엮은이가 이문건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이문건이 느끼고 품었을 감정과 생각들을 대신하여 표현하는 것이 서술방식의 주요 골자인데, 조선시대 몰락 선비의 담백한 어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원하는 맛이 나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양아록>의 한자 원문과 그것을 해석한 한글도 함께 실려 있으니 부족할 것은 없다.


지금 우리 현대사회에서도 육아라는 것은 매운맛의 대명사이지만, 조선시대 육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죽음' 때문이다. 당시에는 죽음이 일상이었으며, 엎어지면 코 닿을 발치에 죽음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자식을 비롯한 가족의 병사病死는 부지기수였다. 이문건 본인은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으나 슬하의 자식 6명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고, 그중 아들 1명이 손자와 손녀를 낳아 겨우 대를 이었을 뿐이다. 의학 기술이 없다시피 하였으니 손자가 원인 모를 병치레를 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기도문을 지어 올리는 게 전부인 할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양아록>에 잘 담겨 있다. 돌잔치는 지금은 그냥 뜻깊은 가족행사 정도의 역할이지만 당시에는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성주신에게 빌고 빌며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간절한 의식이었다는 사실도 나오고, 아픈 할머니의 병세를 확인하고자 변을 찍어 맛보고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내어 고깃국을 끓여드리는 손녀가 병이 도져 아팠다는 뜨악한 에피소드도 나온다.


그리고 당시에는 다양한 교육 시스템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이 인권이나 아동학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상상도 못 할 체벌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손자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으나, 이문건의 손자는 공부엔 재능도 관심도 없었고 여느 아이처럼 놀기만을 좋아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손자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종종 체벌을 동원하는데, 그 수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손자의 종아리를 매질하기 위해 가족들이 줄을 서서 회초리를 잡고 10대씩 순서대로 때린다거나, 뒤통수를 5번 손으로 강타한다거나,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등과 엉덩이를 대나무 막대기로 구타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구속에 징역 감인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 당시엔 그것이 당연하다 여겨졌겠으나, 현대인의 관점에서 봤을 땐 용납 불가능할 정도로 잔인하다. 유소년기를 통과하며 자신의 적성을 찾아 원하는 일을 하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런 개념조차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는 양육자도 피양육자도 모두 괴로웠을 것이다. 양육하는 사람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 연거푸 회초리만 집어드는 것이고, 아이도 그저 매질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엔 오은영 박사가 없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인가 싶다. 키우는 사람도 편하고 커가는 아이도 안전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식과 손주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시대와 사상에 의한 한계가 있었을 뿐, 지식이 부족하고 문명이 덜 진보했을 뿐,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조선시대나 21세기나 그 경중의 비교가 불가하다. 가족 그리고 사랑은 인간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샘솟아 끊기지 않고 흘러내려오는 영원불변의 가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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