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중에 무심코 영양제 병뚜껑을 열었다. 마지막 복용 후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병 안에 영양제가 조금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더운 여름의 습도 때문인지, 자기들끼리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병을 막 흔들어 억지로 떨어뜨려 손바닥 위로 영양제를 올렸다. 한꺼번에 나온 몇 개 중에 한 알을 입에 넣고 컵에 있던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아메리카노라 하기엔 먹다 남은 아메리카노에 더운물을 계속 보충하면서 마시고 있어서 '아메리카노 맛이 나는 물'이라고 하는 게 맞다).
영양제를 삼키다가 문득 남은 유통기한이 걱정됐다. 유통기한이 많이 지난 영양제를 먹는 것보다 안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유통기한을 확인하려고 병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다행히(?)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꽤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왜 지들끼리 녹아서 딱 붙어있는 거지?
책상 위에 다른 영양제 병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색이 변한 것도 있고 멀쩡한 것도 있었지만 괜히 먹기 찝찝한 것들도 있었다. 날씨 탓인가?
집에 영양제를 사놓고 잘 먹지 않아서 챙겨 먹을 요량으로 사무실 책상으로 옮겨뒀는데 그마저도 잘 안 먹어졌다. 외근이 많은 업무특성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책상 앞에서 일하다 보면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안 날 때도 많다.
그런데 어찌 저지 생각이 나서 영양제를 먹었는데 기분이 영 찝찝하다. 책상 위에 오글오글 모아뒀던 영양제로 눈이 갔다. 녹거나 색이 변한 영양제를 미련 없이 버렸다. 먹기에 찝찝한 녀석들도 버렸다. 건강하게 지내려고 구입했던 영양제가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욕심을 너무 부렸나? 기본적으로 종합비타민, 탈모방지에 좋다는 비오틴, 피곤할 때 응급처방약으로 구비한 영국산 비타민 C, 심신안정에 좋다는 마그네슘과 비타민 D, 혈관청소에 좋은 오메가 3, 피부미백을 위한 글루타티온과 매일 아침 쾌변을 위한 각종 유산균까지(평소에 많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다 적어놓고 보니 참 많이도 먹고 있었구나). 마저 다 열거하지 못했지만 어디에 좋다는 영양제, 광고에 현혹되어 구입한 영양제, 조금 싸다 싶으면 샀던 영양제들이 모두 내 책상 위에 집합해 있는 듯했다. 절반 정도를 정리하고 보니 올해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절대로 영양제를 사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상온보관 가능한 영양제라지만 높은 온도와 습도에서 온전히 보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사무실에 있는 영양제뿐만 아니라 집에서 먹는 영양제도 해당이 됐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지만 실제로 여름이 다 지나기까지 내 다짐은 잘 지켜지고 있었나 보다.
영양제를 처음 구입할 때 마음으로 잘 챙겨 먹고 건강해지려고 부지런히 남은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양제들이 불쑥불쑥 서랍에서 나오기도 했다. 서랍도 정리할 겸 흩어져 있는 영양제만 모아도 제법 됐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수기 근처로 모아둔 영양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다가도 주방용품을 모아둔 서랍에서 뜬금없이 잊혔던 영양제들이 짠하고 나타났다. 모조리 다 먹어 없애버리겠다. 한껏 전투력이 상승된 나는 한동안 꾸준히 수집하기만 했던 영양제 복용에 집중했다.
올해 가을은 너무 짧아서 '갈'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짧은 가을이 지나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계절에 큰 애가 감기에 걸려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방과 후에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오라는 당부에도 엄마 말은 귓등으로 듣는지 까먹었다고 할 뿐, 저녁 내내 집에서 잔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감기에 좋은' 비타민 C라도 먹일 겸 정수기 근처를 뒤적거려 봤지만 그 많던 영양제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나는 유산균 변태였는지 유산균만 잔뜩 있다.진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막상 필요한 순간에 찾으니 없다. 급하게 남편을 시켜 집 앞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사 왔다.
올해는 백일해 유행에 독감도 유행이라는데 애들 면역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에 영양제 검색부터 들어간다. 서늘한 실온 보관이 가능한, 영양제 보관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