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 응시번호 '4001'

by 맨아래접시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다.


당시 나는 단기계약직. 기간제근로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번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는 스트레스가 컸다.

결혼하고 거의 10년 동안 경력단절이 있었고 재취업까지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다시 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룰 수는 없었다. 무리하게 낸 대출이 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내 손길이 필요했지만 버틸 때까지 버텨보던 상황이라 일을 해야만 했다.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이 가능한, 주 5일 근무에 주말과 공휴일은 꼭 꼭 쉴 수 있는, 해가지면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양팔에 아이 둘을 각각 끼고 잠들 수 있는 직장을 찾아냈다.

단기계약직.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였다.


기간제 일을 시작하고 2년이 조금 넘는 동안 4~5곳을 옮겨 다니며 일했다. 짧게는 두 달 남짓, 길게는 8개월을 일했다. 원서는 수 없이 써봤고 면접은 20번이 넘게 본 것 같다. 목을 조이는 긴장감을 두르고 생판 모르는 사람 네댓 명 앞에서 바들바들 떨며 면접을 봤다. 가끔 감정 조절이 안 돼서 면접 도중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보다 면접관이 당황하기도 했다. 면접 중에 눈물이라도 나면 100퍼센트 떨어졌다. 면접에서 떨어지고 자존감도 떨어졌다. 잠들기 전에 문득문득 면접 당시 상황이 생각이라도 나면 창피해서 이불킥을 날렸다.


수십 번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이제 엄청 잘하겠다고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지쳤다.

자존심은 원래부터 없었지만 자존감은 남았다고 외치던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 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존감은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수없이 썼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직무기술서를 출력해서 내기만 하면 되는 일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내면 무기력해진다.

자존감 바닥에 조금이라도 닿게 된다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 딱 들러붙을 것만 같았다. 겁이 났다. 어릴 적 어디선가 보았던 '끈끈이'에 들러붙어 바둥거리던 쥐가 떠올랐다. 몸부림칠수록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하는 쥐를 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바닥에 발 끝도 닿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 원서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나의 취업 도전은 멈춰야겠다. 앞으로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람 앞 일을 모르니 절대로라는 말은 참기로 한다.


마지막 면접 후 보름 정도 지났을 때라고 기억한다. 최종 합격자 명단 제일 첫 줄에 익숙한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응시번호 '4001'.

정직원은 아니지만 앞으로 5년은 임기가 보장된, 앞으로 5년은 원서걱정과 면접걱정 없이 지낼, 시간선택제 임기제 공무원이었다. 장기계약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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