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 호우주의보

계약만료 D+1

by 맨아래접시

며칠 전부터 첫째가 운동화 한 켤레를 사달라고 했다. 평소 뭘 사달라고 하는 애가 아니라서 흔쾌히 그러자 했다. 한창 자랄 때에도 맞는 옷이 없어 옷을 사러 가자면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으면 된다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뭘 사달라는 말은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된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거의 집에 없는 날이 많아 며칠 전부터 단단히 일러둬야 했다.


"이번 주 일요일은 다 같이 쇼핑 갈 거니까 주말엔 약속 잡지 말고 시간 비워둬."


일요일 하루를 바라는 것도 사치다. 오전 안에 쇼핑을 끝내야 한다. 사춘기 아이는 가족보다 친구와의 시간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기 때문이다.


두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주말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일이 늘었다. 항상 주말은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이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생겼다. 결국엔 남편이 화내며 주말 외출금지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하지만 별로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억지로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한 들 애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출발할 때부터 언제 집에 가냐고 나만 들들 볶았다. 주말 가족 외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아이들의 사춘기 앞에서 우리 부부는 준비되지 못한 부모일 뿐이었다.

나는 남편과 시간을 잘 보내기로 했다. 미룬 집안일을 하고 시장이나 마트에서 장을 봤다. 평소 가고 싶었던 곳이 있으면 기억해 뒀다가 주말에 남편과 여유 있게 다녀왔다. 남편도 받아들이고 점차 적응했다.

아이들은 독립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고 우리도 아이들의 긍정적인 신호를 잘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첫째의 운동화 리퀘스트는 아주 반가웠다.


최근 성장이 두드러졌던 둘째도 맞는 옷이 없어 같이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네 가족이 하는 외출에 남편도 신이 났다. 차 안에서 남편의 수다가 이어졌다. 기분이 좋다는 신호였다.

남편이 첫째 운동화를 봐주는 동안, 나는 둘째를 데리고 매장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아이가 입을 만한 검은색 반바지 두어 벌을 골랐다. 매장에서 옷을 입어보고 사는 것도 둘째는 귀찮은지 시큰둥했다. 마지못해 피팅룸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귀엽고 웃음이 났다. 결국 골라놓은 옷 세 벌을 다 입지 못하고 두 벌만 '그냥 사자'고 한다.

마음에 드는 바지 두 벌만 들고 남편과 첫째가 있는 곳으로 왔더니, 이미 첫째는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골랐고 남편은 자기가 신을 운동화를 고르고 있었다.


-이번에 운동화 사면 바로 신어. 아낀다고 신발장에 뒀다가 까먹지 말고.

남편은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늘처럼 아이들 신발 보러 왔다가 싼 운동화만 골라 샀다. 자기 발보다 큰 사이즈를 사기도 했다.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데 가격까지 싸면 더 좋아했다. 그는 신발을 살 때 신발 치수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산 신발도 바로 신지 않았다. 신줏단지 모시듯 신발장에 고이 모셔뒀다가 잊었다. 신던 신발만 신고 다니다 또 새 신발을 사기도 했다. 몇 달 혹은 1년이 훨씬 지나서 신발장에서 잊힌 새 신발이 발견되기도 했다.

결혼 18년 차이지만 나는 남편이 신발을 사서 바로 신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무더운 날이 지속되더니 오랜만에 비소식이 들려왔다. 남부지방부터 시작되는 비소식은 곧 전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오전에 쇼핑이슈로 하지 못한 산책을 비가 오기 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저녁 8시부터 비가 올 전망이라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6시 전에 집에서 나가면 8시 전에 집에 들어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챙겨 먹고 남편을 재촉하자, '복면가왕'을 보는 남편이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간 채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새 신발 신고 산책 가볼까.


오늘 산 새 신발에 발을 맞춰보느라 신발 끈을 이리저리 매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간단한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근처 운동기구에서 발을 몇 번 내젓고 있으니 멀리서 남편이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다니던 산책코스에 막 진입하려는데 가는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곧 비가 올 거 같은데. 8시부터 비가 온다 하지 않았나?"

- 비가 언제 시간 맞춰서 오는 거 봤어?

여태 참고 있던 감정이 불쑥 나왔다. 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열 명 남짓이서 한무리를 이뤄 뛰던 러닝 동호회 속도가 빨라지면서 멀어졌다. 결국 산책코스 절반도 가지 못하고 가까운 지붕이 있는 벤치로 비를 피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미쳐 우산을 챙겨 오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소나기 같으니까 좀 기다리면 그치겠지. 새 신발 신고 나왔는데 비 맞고 갈 수 없잖아."

평소라면 개의치 않고 비를 맞으며 정해진 코스를 마저 다 걷고 갔을 테지만 오늘은 새로 산 신발을 신은, 의미 있는 날이지 않은가. 남편은 비가 곧 그칠 것을 기대하며 오늘 채우지 못한 만 오천보를 마저 채우겠노라며 좁은 지붕 아래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 비가 계속 온다 하지 않았어? 비 많이 온다고 재난문자도 왔는데.

하염없이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에 있는 만만한 둘째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1분 가까이 들렸지만 곧 안내음성으로 넘어갔다. 곧이어 첫째한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첫째가 전화를 받는다.

- 여기 호수 앞인데 우산 좀 가지고 올래?

"지금?"

짧은 첫째의 말 한마디에 '지금 가기 싫다'는 감정이 실린다.

- 동생은 뭐 하니?

"옆에 있는데."

- 엄마하고 아빠 우산 좀 갖다 줘. 비가 많이 와서 못 가겠어."

정확하게는 아빠 새 신발이 젖을까 봐 가지 못하겠다고 했어야 한다.

"... ㅏㄹ았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첫째의 대답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오래 붙들고 있다간 결국엔 오지 않겠다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할 수도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지붕 아래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나와 남편, 거리를 두고 앉은 낯선 할아버지와 아줌마가 보인다. 남편은 여전히 지붕아래를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와 비가 많이 오는가 보다. 물이 들어오네."

바닥을 보자 빗물이 흘러들어 고이기 시작한다. 남편의 새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인 물에 빗방울이 생기면 비가 많이 온대.

어릴 적 아빠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고인 물에 빗줄기가 닿자 빗방울이 맺혔다.


몇 분이 더 지나자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해가 진 듯 완전 어두워졌다. 천둥이 치고 번개 불빛이 번쩍거렸다.

"첫째가 오는지 전화해 볼까."

-오고 있을 걸. 첫째는 올 거야. 첫째는 안 한다는 말 잘 안 하니까. 걔는 올 거야.

평소라면 집에서 출발해서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비가 오니까 오는 시간이 평소보다 더 걸릴 것이다. 이제 지붕 아래에는 우리 부부만 남았다.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움직이던 남편도 내 옆에 와 섰다.

"어느 쪽으로 올까..."

첫째가 올 것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익숙한 모습을 찾았다. 어두운 날에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어 먼 곳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쩌다 우산을 쓰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뛰거나 걸음을 재촉하면서 지나갔지만 첫째는 보이지 않았다.


"와! 저기 오네. 진짜 우리 첫째 오네!"

어기적어기적 천천히 걸어오는 첫째가 보였다. 누가 봐도 억지로 걷는 모습이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얼른 가서 껴안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칭찬해 주고 싶었지만 비는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금일 오후 6시부로 호우주의보 발효에 따라 비상근무를 실시하오니...


나는 통화내용을 다 듣지 않고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 근무 18일이 지난, 계약만료 하루가 지난 오늘이었다.






<퇴사하겠습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첫 브런치 연재라 걱정이 많았는데 결국엔 마무리가 됐네요.

계획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 읽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