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만료 D-1
샤워를 하고 욕실장 거울을 밀어 수건을 꺼내려 보니, 불과 이틀 전에 수건으로 꽉꽉 채워놓았던 수건장이 거의 비어있었다. 맨 위칸에 잘 포갠 흰 수건 네 장을 제외하고는.
발을 들어 맨 위칸에 있는 수건을 손 끝으로 빼내려는데 잘 빠지지 않는다.
"아오 씨..."
짜증이 올라와 혼잣말을 내뱉었다.
마침 거실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짜증이 배로 올라왔다. 수건 꺼내기를 포기하고 전화를 받을 것인지, 전화받기를 포기하고 수건을 꺼낼 것인가를 고민하던 순간, 수건 하나가 툭 빠졌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운 좋게 손으로 받았다. 급하게 몸을 닦으며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자꾸 전화드리기 미안한데..."
후임자였다.
"... 업무랑 관련해서... 수불도 그렇고..."
-수불 관련 업무는 병가선생님이 하던 일인데 선생님이 하세요?
"팀장님이, 이제 곧 병가선생님 계약만료 된다고 업무 받아서 하라고 하셔서요... 병가선생님은 요즘 매일 출장 나가서 퇴근 전에야 들어오세요."
후임자는 이제 막 교육을 받은 직후라, 아직 사업 시작도 못했다며 하소연했다. 팀장이 출근 첫날에 업무 몇 가지를 넘기며 '잘 모르면 주변에 물어보라'라고 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전화했노라며 미안해했다.
아직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방에 있는 욕실을 주로 사용하는 나는 가끔 거실 욕실을 쓴다. 샤워도 할 겸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서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은 거실에 있는 욕실을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조금만 소홀해도 거실 화장실은 금방 더러워진다.
한 번은 거실 화장실을 쓰는데 휴지가 없는 걸 발견하고 채워 넣으려다 깜박한 적이 있다. 며칠 후에 거실 화장실을 쓰면서 휴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채워 넣어야지 생각하는 순간, 아니 그럼 그동안 이 남자들은 집에서 볼일 보고 어떻게 해결한 거지?
샴푸는 종종 빈 통으로 발견되지만 바디 워시는 몇 달째 처음 개봉했던 그때 그 중량감을 유지하고 있다. 새로 개봉한 치약 뚜껑은 분실 상태고 칫솔은 자주 바꿔주지만 항상 솔이 벌어져 있다. 화장실 청소용 칫솔이나 운동화 세탁용 칫솔이라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남자 셋과 사는 집은 현관 입구부터 신경이 쓰인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수컷 냄새가 난다. 현관 입구에 방향제도 둬봤지만 수컷 냄새가 방향제 향을 이겨버렸다. 사춘기가 한창인 첫째는 아침, 저녁으로 씻는다. 씻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사춘기 아들이 씻을 때는 절대로 재촉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정말 정말 많이 참는다. 그런데 땀냄새와 발냄새, 성장기 호르몬 냄새가 뒤죽박죽 섞인 첫째의 사춘기 냄새는 좀 참기 힘들다. 고가 향수와 질 좋은 방향제도 소용없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둘째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편이지만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어린이 목소리를 가졌다. 가끔 겨드랑이를 들어 털이 났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뽀얀 겨드랑이 살이 귀엽다.
남편은 진짜 수컷냄새를 풍긴다. 남편은 하루에도 두세 번은 씻는 것 같은데 남편이 머물렀던 자리에서는 남편 냄새가 남는다. 언젠가 남편이 입던 헌 티셔츠를 곰인형에게 입혔더니 둘째가 아빠 냄새가 난다며 치워달라고 했다. 세탁은 물론 이부자리도 자주 빨지만 도대체 얼마나 부지런해야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이 가능한지 정말 알고 싶다.
가끔 손님이 오면 쓰게 되는 화장실이 거실 화장실이기도 해서 거실 화장실은 신경이 쓰인다. 하얀 수건이 조금 더 깨끗해 보일까 싶어서 거실 화장실에는 흰 수건만 뒀다.
남자 세 명이 쓰는 거실 욕실의 수건 소비는 하루 최소 3개 이상이다. 무슨 호텔도 아니고 한 명이 씻을 때마다 기본적으로 수건 하나 이상은 나온다. 세탁기는 매일 돌아가지만 어쩌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세탁기 돌리는 일을 깜빡했다간 수건장에 수건이 없어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 수건을 갖다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퇴사를 생각하면서였을까. 퇴사를 결심하면서였을까. 나는 무기력해졌다. 마치 오래된 배터리 같았다. 충전이 잘 안 되고 방전은 더 잘 되는.
너무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온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아파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아프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날도 있었다. 지각만 면하게 겨우 출근하고, 퇴근하면 집안일이 한참 밀려있었다. 매일 두어 시간씩 집안일을 해도 다음날이면 또 그만큼 집안일을 해야 했다. 나는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가족들은 하나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화딱질이 나서 청소솔을 집어던진 적도 있다. 혼자서 3명을 상대하는, 꼭 1대 3으로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는데 또 전화가 울린다. 후임자가 더 묻고 싶은 게 남았나 싶어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니 마음선생님이다.
"뭐 하니?"
-집에 그냥 있어요.
"누구 안 만나? 더운데 어디 나가기도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퇴사하고 집에 있으면서 가족 외에 친구나 누군가를 따로 만난 적이 없다.
"이번 인사이동 때 너희 팀장은 그대로 있더라. 아마 내년 1월에는 가겠지. 네 자리에 온 선생님들은 점심때 보니까 입맛도 없다면서 식사도 잘 안 하시는 것 같던데."
-차석은요? 안 온대요?
연초에 병가 낸 차석이 생각났다. 8월 복직 예정이었다.
"너희 팀장이 있는데 들어오겠냐. 올해 말까지 병가 연장했다더라. 아마 7월 정기인사 하는 거 봐서 들어오려고 한 거 같은데 팀장이 저렇게 자리 지키고 있으면 나 같아도 안 들어올 것 같아. 그런데 너, 그만두고 계속 집에만 있었어?"
-아직 계약만료 전이거든요. 아직 연가 중이에요. 내일이면 진짜로 계약만료네요. 저녁에 좀 선선해지면 산책이나 나갈까, 지금은 누구를 만나고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낮에는 집에 있어요.
"무슨 연가를 그렇게 많이 아껴뒀대? ㅎㅎ 조금 있으면 초복이더라. 이번 초복은 주말이던데 우리는 중복 때 만나서 점심 먹을래?"
마음선생님과 회사 얘길 하면서 이전보다 관심이 덜해진 나를 느꼈다. 복잡하고 시끄러웠던 그곳에서 일들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퇴사한 지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 그곳에서 일은 나랑 전혀 관련 없는 일이 되었다.
퇴사 후 시간이 지날수록 화와 분노의 감정은 시간과 뒤섞여 희석되는 것 같다. 화가 옅어지며 화에 눌렸던 기운도 점점 회복되고 있다.
해가 진 저녁 산책길에 수박향이 나는 나무 밑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올봄에 이 나무 아래를 걷던 기억이 났다. 청초한 벚꽃 잎이 하늘을 빼곡히 가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곧 떨어질 벚꽃이 아쉬워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남기던 곳이었다.
여름 벚나무 아래에서는 수박향이 난다. 풀냄새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은은한 수박향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는 수박을 넣은 맛있는 화채를 만들어 줘야겠다.
휴대폰을 보면서 수박화채를 입에 넣던 첫째가 날 부른다.
"엄마, 영어 캠프에서 먹은 화채가 정말 맛있었는데. 그거, 화난 부랄 같이 생긴 과일이 있거든?"
소파에 앉아 화채를 먹는 첫째를 구경하던 내가 뭘 들었나 싶어 '?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뒤이어 말을 잇는다.
"빨갛게, 화난 부랄 같이 생겼는데 막 털이 엄청 달려서... 그 껍질을 까면 안에 하얀 열매가 있어."
못 알아듣는 나를 보며 첫째는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하는데, 마주 앉은 둘째가 입안에 있는 화채를 씹으며 말한다.
"야, 그거 뷔페 가면 있는 거. 그거, 리치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