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이어, 이제는 ‘라이온 킹’까지 실사의 형태로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인어공주’의 실사화 캐스팅도 공개됐다. 디즈니가 기존의 ‘디즈니 클래식’ 실사화에 제대로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인데, 보고 있자면 사실상 ‘공격적 투자와 안전한 영화’가 이 거대기업의 새로운 모토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에게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 없는 건가?
사실 나는 ‘꼭 만화여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디즈니의 수많은 실사화 계획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그중 굳이 따로 찾아보지 않은 작품들도 많다. 그러던 중 ‘speechless’가 엄청나다는 소문을 듣고 ‘알라딘’을 보러 갔다. 내 두 발로 극장을 찾았지만 누가 억지로 밀어 넣은 것 마냥, 비판하려고 작정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잠깐, 여기서 나는 ‘보고 나니 결국 매료되어 있더라’는 나이브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실사화라는 기획이 안고 있는 근원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를 통해 결국 성취해낸 부분들은 분명 있었다. 그 득과 실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는 차원에서 쓰는 글이라고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1. 실사화의 근원적 한계
서사가 있고, 그 서사를 전달하는 이미지가 있다. 혹은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서사가 있다. 그리고 두 명제 사이의 어느 지점에 ‘영화’가 있다. 실사화는 기존의 서사를 그대로 가져오되,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려는 시도다. 새로운 질감, 운동감, 촬영(원작에는 애초에 촬영이 없다)을 통해 오래된 서사들이 다시금 우리 앞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렇게 알라딘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온 알라딘의 서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알고 있다. 소유에 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지금에서도 그때와 한치의 다름 없이 유효하다. 그러니 이미 대단한 서사를 (특정 맥락을 제외하고)그대로 끌어온 새 '알라딘'을 논하는데 있어서 그 서사의 대단함에 주목하는건 실상 그리 대단하지 않은 시각으로 보인다. 우리는 서사 대신,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지난 세기에서 건너온 이 활력 넘치는 이야기가, 실사라는 질감에 닿았을 때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또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실사화라는 거대기획을 진단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만화가 실사의 형태로 옮겨갔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크고 작음을 따질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변한다. 세계가 바뀌기 때문이다. 만화의 세계는 현실과 고립된 세계다. 현실의 이미지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나 실사의 세계는 많은 부분 현실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스민 공주가 달리는 장면은 어딘가 에서 나오미 스콧이 실제로 달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지니의 피부색은 가짜지만 춤의 운동감만큼은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성은 카메라 앞의 ‘연기’라는 행위, ‘연출’이라는 속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비가시편집 조차 그 자체로 속이는 행위, 혹은 기만이 될지 언정, 영화에 내재된 허위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진실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기에, 역으로 그 허위성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실사)영화의 속성이다. 반대의 논리로 진실의 이미지가 배제된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허위가 아닌, 독립된 세계의 진실로 살아남는다.
디즈니의 동화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실사로 돌아온 그때의 이야기들이, 그때 그 시절의 ‘디즈니 클래식’과 같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국내에서 비슷한 흥행을 거두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사람들은 실사판 ‘알라딘’보다 ‘겨울왕국’을 더 추억하게 될 것이다. 진실에 닿아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듯이, 진실과 떨어졌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알라딘’의 이야기는 명백히 후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이 기획이 완전한 실패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오히려 크게 두가지 지점에서 영화는 ‘실사의 당위성’을 증명한다. 많은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지점들이기도 한데, 바로 윌 스미스의 지니와 ‘speechless’다. 윌 스미스의 지니는 명백히 스크린 밖의 인물 윌 스미스의 캐릭터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 케이스다. 흥 많고 유머러스한 지니의 모습은 TV쇼나 본인의 인스타에서 만나는 실제 윌 스미스의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다. 실사화 때문에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가 옅어진 틈을 역으로 이용해, 현실의 캐릭터를 극 속으로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짧은 등장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니의 캐릭터가 여타 캐릭터에 비해 탄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웃음을 만드는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익숙한 익살꾼의 익숙한 코드이기에, 관객들은 별도의 로딩 없이도 지니의 유머에 박장대소 할 수 있다.
‘speechless’씬도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물론 노래 자체도 훌륭하다. 이야기도 장면을 잘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는 전율에 가까운 강한 감흥은 사실상 나오미 스콧의 공이다. 그녀의 날선 핏대와 충혈되다시피 한 눈이 아니었다면, 이 장면이 그만큼의 감동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하게, 실사였기에 가능했던 성취다. 만화의 캐릭터가 재현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영화는 실사화의 당위성을 또 한번입증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알라딘’은, 현실의 캐릭터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혹은 만화가 가진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장된 연기로 그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실사화에 따른 ‘실’과 비교해봤을 때 다소 초라한 ‘득’이다. 디즈니의 잇따른 실사화가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선, 앞으로의 작품에서도 끊임 없이 새로운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들이 선택한 이 전인미답의 길 위에서, 아무도 채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들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그들의 정치적 나이브함이 공격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화적 게으름이 공격 받을 것이다.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들의 다음 영화들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 볼 생각이다.
3. 정치적 올바름
논외의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가 전작에 비해 크게 발전한 부분은 따로 있다. 꼭 실사여야 할 이유가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칭찬받아 마땅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기에 구태여 쓴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다. 바로 자스민의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다.
자스민이 술탄이 되어 법을 직접 바꾼다는 설정부터, 침묵하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까지,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물론 이 영화가 자스민을 입체적인 여성으로 그렸냐고 묻는다면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의 어떤 인물도 입체적이지 않다. 또 누군가는 그 진정성에 대해 반문하기도 한다. 단지 상업적으로 페미니즘 코드를 차용했을 뿐, 진중한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어찌됐든 이 변화를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자스민의 이야기는 지난 세기 젠더문제나 인종 문제에 있어서 끊임 없이 공격받았던 디즈니가, 21세기에 새로 쓰는 동화에 동봉한 반성문과도 같다. 철저히 주류 중심의 낡은 서사를 발행해왔던 디즈니가,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하려는 그 시도를 나는 높이 평가한다. 인어공주의 캐스팅도 논란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의 많은 디즈니 작품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디즈니는,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써낸 서툰 반성문에 박수를 보내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가 볼 미래의 영상 동화를 응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