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놀랐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때부터 기대하던 감독이긴 했지만, 이런 걸 가지고 돌아오다니!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며 인물들을 가지치기한 마블이, 줄어든 인물들의 중량감을 이야기로 채웠다. 그렇다고 영화가 다크나이트처럼 묵직하거나 왓치맨처럼 음울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한 순간도 유머를 잃지 않고, 시종 경쾌하다. 그리고 그 가벼운 스탭으로 뼈를 때리는 질문들을 던진다. 관객에게? 아니. 영화 스스로에게. 그렇다. 이건 메타영화다. 히어로무비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야기고, 스스로를 해체함으로써 다시금 태어나는, 말 그대로 명멸하는 영화다. 그러나 그 물음이 자문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문하는 이 영화의 물음은 결국 관객에게 까지 닿는다. 그리고 그 한번의 물음에 우리는, 아마 오래도록 대답하게 될 것 같다.
1. 자가당착
‘파 프롬 홈’의 메인 빌런인 미스테리오는 허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홀로그램으로 가상의 적을 만든 뒤, 그 적들을 물리친다. 왜? 토니 스타크처럼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고 실제로 사람들은 반응한다. 그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의 영상들을 퍼나른다. 허상과 싸움으로써 영웅이 된 사람이라니. 분명 독특한 캐릭터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 미스터리한 인물을 보고 있자면 묘한 기시감 같은 게 엄습한다. 특히 극장에서의 장면. 그곳에서 미스테리오와 그 일당들은 자기네들이 만든 홀로그램을 점검하면서 장면장면을 세세하게 다듬는다. 어떤 집단이 떠오르지 않는가? 스튜디오에 모여, 가상의 적을 만들고, 그들을 때려부수는 ‘척’ 하며 영웅행세를 하는 그런 집단 말이다. 그렇다. 영화 안에서의 미스테리오는, 영화밖의 세상에서 본 마블과도 같다. 그들은 허상을 팔고 영웅을 만든다. 조작된 영웅서사를 우스꽝스럽게 전시함으로써 영화는 스스로를 모순 속에 가두어버린다.
‘파 프롬 홈’은 이러한 자가당착의 상황을 놀라운 시각적 장치들로 드러낸다. 토니 스타크의 선글라스를 낀 미스테리오의 얼굴이 마치 편집된 것 마냥 스타크의 얼굴과 겹쳐진다. 파커는 그 이미지에 깜빡 속아 선글라스를 넘겼다가, 속임수를 눈치채고는 다시 찾으러 간다. 선글라스를 다시 찾으려는 과정에서 그는 미스테리오의 홀로그램에 의해 생성된 가상의 방에서 자기자신과 싸우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스파이더맨과 미스테리오의 투쟁이지만 더 들여다보면, 미스테리오를 통해 영웅서사 이면의 허상을 마주한 스파이더맨이 자기모순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 스파이더맨을 공격하는 수많은 스파이더맨들. 이 난투속에서 파커는 갈피를 잃고 쓰러진다.
2.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 차례 쓰러졌던 스파이더맨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진격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허상 속으로 직접 들어가 드론들을 파괴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파괴행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영웅서사의 상징을 직접 부숨으로써, 지금껏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렇게 무의 상태로 회귀한 스파이더맨은, 다시 미스테리오를 만나러 간다. 눈을 감고, 시각적 허상 뒤에 숨은 실체를 감각하며 싸운다. 결국 미스테리오를 쓰러뜨림으로써, 스파이더맨은 다시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허상을 극복하지 못했던 그때는 졌지만, 허상을 파괴한 뒤에는 이겼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3.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영화는 결국 히어로무비 스스로 히어로무비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메타영화이자, 끝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긍정을 찾아가는 변증의 이야기다. 자기 내면의 모순을 밖으로 꺼낸 뒤 깨부수는 영화다. 혹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들어가 싸우고 나오는 영화다. 표현이야 어찌됐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파커가 그랬던 것처럼, 히어로영화의 본질을 자문하게 된다. 이어지는 단락들은 그 자문에 대한 내 미완의 자답이다.
영웅서사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 단지 싸운다는 차원에서의 폭력이 아니다. 서사의 층위에서, 이야기가 영웅 이외의 인물들을 객체화 한다는 점에서의 폭력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언맨이 상공을 날며 미사일을 난사할 때, 건물들이 무너지고 차가 뒤집어진다. 결국 빌런은 제압당하지만, 아이언맨이라는 영웅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참사 속에서 희생당한 인물들에게 카메라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베니스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이러한 히어로무비 클리셰에 대한 일종의 반성처럼 보인다. ‘가짜’인 미스테리오는 적과 싸우고 주목을 받는다. 그동안 ‘진짜’ 스파이더맨은 무너지는 건물들을 고친다. 그리고 수트도 입지 않은 스파이더맨에게,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플래시는 뉴스를 보며, 자신이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한다. MJ는 철퇴로 드론을 내리치고, 해피는(비록 실패하지만) 방패를 던진다. 영웅은 결국 하나의 상징이다. 영웅이 대변하는 가치, 이를테면 정의, 참여, 희생과 같은 것들이 실상 히어로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를 지키는 영웅들을 보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하고, 결국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작은 영웅이 되는 것, 21세기에도 영웅서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러한 가치들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너무나도 커져버린 마블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과 괴리되어 버렸다. 그러곤 ‘파 프롬 홈’이 나왔다. 마블의 한 시대가 지나간 이 시점에서, 허상을 부수고 본질을 감각하려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겸허한 선언이기도 하다. 물론 새로운 페이즈도 결국 우주로 나갈 것이다. 거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비쥬얼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그러는 중 때때로, 히어로의 본질과 멀어질 때도 있을 거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존재는 더더욱 소중하다. 그들이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다고 느낄 때(Far from home), 언제든지 돌아와 수련할 수 있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 있다는 건 한편으로 참 다행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