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 엄마 그리고 막내딸

막내는 태어나고

by 수연길모

외할머니는 마을 일대에서 음식 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잔치가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에 가서 음식 준비를 해주곤 했다. 지금으로 치면 출장 요리사인 셈이다. 외가는 늘 맛있는 음식으로 넘쳤다.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엄마는 우리 형제들을 순서를 정해 외갓집에 보냈다. 내가 6, 7살쯤 외갓집에서 지내던 때였다. 한 번도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는 이상한 김치가 있어서 호기심에 하나 집어 먹어보았다. 얼얼하고 톡 쏘는 그 맛이 어린 내 머릿속을 즉시 마비시켜버렸다. 그 김치는 ‘갓김치’였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뚝딱 만들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추어탕, 보신탕, 조기매운탕, 닭백숙이며 큰언니가 그리워하는 홍어 무침, 큰오빠가 좋아하는 찰밥과 겉절이 김치, 둘째 언니가 젤 먹고 싶은 콩나물 김칫국, 셋째 언니가 밥 두 공기 비우는 고구마 줄기 고등어조림, 작은오빠가 코 박고 먹던 돼지고기 두부 김치찌개, 그리고 막내인 내가 엄마 손맛이 그리워 만들지만 흉내 낼 수 없는 무채김치도 엄마는 후다닥 만들었다.


그러나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복막투석 환자에겐 해로운 새우탕 컵라면과 달콤한 커피믹스를 사랑했다. 우연히 엄마 집에 들렀는데 엄마가 컵라면을 먹고 있으면 나는 그 즉시 엄마의 주치의로 빙의되어 얼마나 살벌하게 잔소리를 해댔는지 모른다. 그럼 엄마는 딸 앞에서 길게 늘어진 얼굴을 하고 한숨만 쉬셨다. 엄마는 기력이 약해지면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줄어들고 영감 냄새난다고 경로당에 가는 것도 질색했다. 오로지 자식들만 기다렸다. 컵라면, 커피믹스 그리고 텔레비전에 기대어 자식들만 기다린 엄마의 외로움을 그땐 알지 못했다. 그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엄마만 타박했다.








정미소가 불이 나고 먹고살 일은 더 막막해졌다. 그래서 부산에서 일하고 있던 큰언니를 따라 큰오빠와 둘째 언니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돈을 벌러 가야 했다. 해 질 녘이면 함지박을 들고 오늘은 누구 집에 쌀을 꾸러 가야 하나 고민하며 마을 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을 큰오빠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렇게 그 집에서 쌀을 꾸면 농번기엔 엄마는 소처럼 그 집 논에서 일해야 했다. 내가 네다섯 살 때쯤 엄마가 나를 재우고 남의 집 모내기를 하러 갔다. 자다 깬 나는 엄마 찾아 동네를 헤매다 마침내 일하고 있는 엄마를 찾자 논두렁에 앉아 “엄마, 집에 가자. 엄마, 집에 가자.”하고 울던 날이 생각난다.


엄마는 ‘화순 광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우리 마을에는 광부 아저씨들이 꽤 있었는데 그중 아버지와 친한 아저씨가 화순 광업소 선탄부에서 여자 광부를 구한다고 알려주었다. 선탄부는 갱내에서 생산한 석탄이 운반될 때 탄 속에 섞여 있는 돌이나 나무 덩이를 골라내는 중노동을 하는 곳이었으며 주 업무는 고된 삽질이었다. 선탄직은 탄광촌의 유일한 여성 일자리이기도 했다. 주부의 일자리가 거의 없던 농촌에서 선탄부는 대표적인 여성의 일자리이자, 보수가 높은 일자리로 취업 경쟁률이 높았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탄부로 취업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사라져 가는 기억, 한국의 탄광>, 한국문화원연합회, 정연수, 2010)


화순 광업소는 집에서 초등학생 걸음으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선탄부 일의 제일 힘든 부분은 3교대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집안 살림에 아이들 건사에 그리고 3교대 근무까지 해야 했다. 한 번은 둘째 언니가 젖먹이였던 나를 업고 밥과 김치를 넣은 엄마 도시락을 가지고 걸어서 광업소에 갔다. 선탄부에 갔지만, 굉음 속에 얼굴이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눈만 반짝이는 사람 형체 속에서 엄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언니를 불러 도시락을 받고 언니는 멀리서 엄마가 시커먼 얼굴로 동생에게 젖을 먹이며 차디찬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머리에 모자와 수건으로 싸매고 두 겹의 장갑과 마스크를 쓰는 중무장을 해도 탄가루가 온몸을 비집고 다니는 막장 일을 엄마는 맘 편하게 할 수도 없었다. 큰오빠와 둘째 언니가 부산으로 떠난 뒤였다. 엄마의 야간 근무 때가 되면 술 취한 아버지가 당장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초등학교 6학년 셋째 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셋째 언니와 둘째 오빠는 가로등도 없는 칠흑 같은 시골 밤길을 한 시간 동안 걸어 광업소에 도착했다. 남매를 발견한 엄마는 바로 집에 갈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언니, 오빠는 엄마가 마치는 시간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 나면 엄마와 함께 셋이서 깨끗이 씻고 집으로 왔다. 그러나 집에 오면 엄마는 쉴 수 없었다. 술 취한 아버지는 욕과 노래 그리고 신세 한탄이 뒤섞인 술주정으로 엄마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얗게 밤을 새우고 그다음 날 엄마는 일하러 가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평생 그렇게 싸우셨음에도 아이를 여덟이나 낳은 것을 보면 꼭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은 인간사의 신비를 깨닫곤 한다. 엄마가 여섯째를 임신했다. 친한 이웃이었던 갑순이 엄마도 같은 시기에 임신했지만 임신 중절 수술비가 있었던 이웃은 아이를 지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는 돈이 없이 그 아이를 열 달 동안 품을 수밖에 없었다. 새해가 되고 며칠 뒤 지독히도 추운 어느 날 새벽, 엄마는 산기를 느끼고 아버지를 깨웠다. 아버지와 모든 자식은 일어나 이 난리 통을 지켜보게 된다. 우선 아랫목에 비료 비닐을 깨끗이 씻어 깔았다. 부엌에선 임복이 오빠가 솥에 물을 끓이고, 셋째 언니와 둘째 오빠는 아버지의 이부자리로 쫓겨나 아랫목에 누워있는 엄마를 지켜본다. 돈이 없어 산파도 부르지 못한 엄마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마지막 자식을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까만 아기의 머리가 보인다. 딸이다!

아버지는 부엌에 있는 큰 자식에게 “또 딸이다. 엎어버릴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임복이 오빠는 “그러지 마시오. 아버지” 하는 운명을 가르는 말을 한다. 그렇게 나는 임신 중절 수술비가 없는 가난과 임복 오빠의 한 마디 덕분에 엄마의 마지막 딸로 태어났다.







사진: 박병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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