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부산으로

아버지의 그림자

by 수연길모

부산에 살 때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그때는 ‘사후생’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었다)를 봤는데 그 영화는 죽음에 대해 신선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천국으로 가기 전 생애를 마친 영혼들은 중간역 ‘림보’라는 곳에 모인다. 그들은 이곳에 7일간 머물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골라야 한다. 림보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하기를 거부한 영혼들이다. 직원들은 자신들이 맡은 영혼들이 선택한 추억을 짧은 영화로 만드는 일을 한다. 마지막 날 영혼들은 영화관 같은 곳에 모여 자신의 추억 영화를 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들어가 살 게 되고 림보를 떠나게 된다.


영화를 본 후 내 삶에서 영원히 머물고픈 순간이 무엇인지 자주 묻곤 했다. 그 순간들은 나이 때 별로 달랐지만 대단한 장면들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주 짧지만, 무의식에 오랜 시간 동안 똬리를 틀만큼 삶에서 보기 힘든 평화와 사랑이 공존하는 순간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엄마와 함께 있는 순간이다. 나는 부산으로 이사하기 전 7살 때까지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긴 머리를 갖고 있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동네를 짤랑거리며 다니는 모습을 동네 어르신들은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내가 6, 7살 때쯤이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엄마가 일을 나가지 않고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상냥한 봄바람이 불었다. 엄마가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빗을 갖고 왔다. 빨랫줄 옆 장독대 앞에 나를 앉히고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긴 머리를 빗겨주었다. 나는 엄마를 독차지했던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엄마는 나를 37살에 낳았다. 내가 태어난 뒤로도 엄마와 아버지는 매일같이 싸웠다. 술 취한 사람의 말을 무시해도 좋으련만 엄마는 아버지 말에 사사건건 목소리를 높이고 아버지가 걸어오는 비정상적인 요구와 시비를 악착같이 낚아채서 거기에 모욕과 조롱을 얹어 되돌려주곤 했다. 그러면 약 오른 아버지는 완력을 쓰고 그 싸움의 결말은 엄마가 죽도록 맞고 끝이 나곤 했다.


추석 명절이 되어 부산에서 일하는 큰오빠와 작은 언니가 화순 집에 왔다. 큰오빠는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싸우고 있는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동생들을 보았다. 사실 순한 성격의 큰오빠 인내심은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화순에서 학교에 다니는 셋째 언니를 시켜 하루가 멀다고 부산에서 일하고 있는 큰오빠에게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쓰게 했다. 그러면 큰오빠는 주인집 할머니께 돈을 꾸거나 친구들에게 부탁해 돈을 마련해서 보내곤 했다.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바뀐 그 상황에 진저리가 나 있던 큰오빠는 추석에 가서 또다시 목격한 부모님의 지칠 줄 모르는 부부싸움과 자식을 향한 염치없는 요구에 지쳐 부산으로 이사하자고 말했다. 이에 엄마는 희망이 없는 화순을 떠나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 연휴가 끝나고 큰오빠는 일단 오빠와 언니가 사는 부산 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세 동생을 부산으로 전학을 시켰다. 드디어 이삿짐을 빼는 날이 왔다. 그날까지도 아버지는 떠날 수 없다고 완강히 집안에서 버텼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아버지 편은 아무도 없었고 아버지는 엄마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시집간 큰언니만 빼고 우리 5형제와 부모님은 부산에 도착해서 모라 시장 근처 단칸방에 살았다. 그 집엔 1층엔 서너 가구가 세 들어 살았고 2층엔 주인집이 살았다. 주인아저씨 이름은 김을호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아저씨는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에 처진 눈, 두툼한 입술에 머릿결은 힘없이 축축 쳐졌었다. 아저씨는 말이 없었고 늘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하지만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주인아줌마는 아주 표독스러웠다. 부산에 와서 남의 집 셋방살이에도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엄마와 싸웠다. 그러면 주인아줌마는 어김없이 나타나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고 당장 나가라고 엄마한테 인정사정없이 면박을 줬다. 자존심 강한 엄마지만 주인아줌마한테는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며 싹싹 빌어야 했다. 우리 엄마를 초라하게 만드는 주인아줌마가 미웠다. 어릴 적 내 눈엔 주인아줌마는 세상 제일의 악당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이 김을호 아저씨네의 평화를 깨는 악당이었다.


부모님은 부산에 온 후 얼마 뒤 나란히 취직하셨다. 부산에서 첫 직장은 산업도로 쪽에 있던 목재공장이었다. 하지만 한량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허리가 아프단 이유로 일주일 정도 다니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곧이어 엄마도 그곳을 나와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화순에서 우리와 가족같이 지냈던 은수 아저씨와 함께 초량동 유조선 기름탱크 청소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일도 오래 하진 못했다.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일을 하다가 오랜만에 집에 온 아버지를 기억한다. 주황색 털이 거칠게 붙은 검은색 긴 항공 점퍼를 입고 오랫동안 감지 못한 것 같은 머리는 엉켜있고 눈과 볼이 움푹 패 시커먼 해골과 같이 살이 빠져 돌아왔다.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마음껏 앓는 소리를 해도, 먹고 싶은 음식을 요구해도 엄마는 조용히 다 들어줬다. 그러나 그 기름탱크 청소를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일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며 일하지 않는 이유가 허리가 아픈 것 때문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항변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돈 벌지 않는 가장을 자식들 앞에서 목소리 높여 비난하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다 최근에 ‘다큐 3일’이란 프로그램에서 유조선을 수리하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그 과정엔 기름탱크 청소도 있어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배의 성능을 높이는 중요한 작업이 기름탱크 청소라고 했다. 예전엔 남자들이 했지만, 요즘은 중년의 키가 자그마하신 아주머니들이 하고 있었다. 그 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프로그램에 나온 배의 기름 탱크는 성인이 쪼그리고 앉을 높이에 사다리로 네 개의 층이 연결된 구조였다. 캄캄한 어둠,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 그리고 몇 분만 있어도 두통이 생기고 속이 메스꺼운 기름 냄새 속에서 경계도 알 수 없는 바닥과 벽을 아주머니들은 머리에 랜턴을 달고 마스크를 몇 겹을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닦고 있었다.


아무리 무능력하고 평생 술에 찌들어 살았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곳에서 일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물론 그곳을 끝으로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집 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부산에 와서 무엇이 아버지를 술과 함께 집안으로 고립되게 했는지 지금에서야 궁금해졌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술주정과 함께 엄마의 아버지를 향한 비난을 평생 들었다. 우리의 인생관이 형성되기도 훨씬 전부터 엄마의 틀로 아버지를 봐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악의 축’이었고 우리는 엄마라는 정의롭고 안전한 진영에서 똘똘 뭉쳐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뒷모습이 조금씩 느껴지자 엄마가 조금만 더 아버지를 공감해주고 다정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쌀이 없는 극한의 궁핍의 상황에서 ‘공감’, ‘친절’ 이런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떠올려 보니 한숨이 나온다. 엄마도 아버지도 가난 속에서 자신을 잃고 서로를 잃으며 부산에서 정착하고 있었다.





그림: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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