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종이 엄마

뇌선 두통약과 커피를 든 산업역군, 우리 엄마

by 수연길모

나는 부모님의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의 전속 안마사였다.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허리가 약했다. 허리가 약한데 중노동을 해야 하니 짜증이 많았고 일이 끝난 뒤 밖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집에 들어와 아랫목에 누워 “막내야 허리 좀 밟아라”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럼 나는 사뿐사뿐 아버지의 허리를 밟았다. 내가 살살 밟으면 “아이고 시원해라” 하셨고 내가 슬슬 지겨워 막 밟아버리기 시작하면 “오메! 사람 죽네”하고 죽는시늉을 내셨다. 허리를 밟은 다음 다리를 주무를 차례다. 아버지의 몸은 살이 없이 깡말랐었다. 특히 아버지의 오른쪽 정강이는 사고로 뼈가 피부층에 도드라져 징그러웠고 반질반질한 광택을 띠고 있어서 만지면 따뜻한 유리 같았다. 아버지 안마를 할 때면 시간은 정말이지 천천히 흘렀다.


엄마는 안마하라고 시키지는 않았다. 내가 자발적으로 안마를 시작해도 내가 힘들까 봐 얼른 그만두게 했다. 안마가 아니어도 나는 엄마의 살결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도 살결이 뽀얗고 아기 피부 결 같았기 때문이다. 또 마른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살이 많았다. 특히 햇볕을 한 번도 쐰 적이 없는 것 같은 보드랍고 뽀얀 팔뚝 살과 아이를 여덟이나 낳느라 축축 처지고 흐물흐물한 뱃살을 만지는 것은 잠들기 전 나의 의식이었다. 엄마는 안마 대신 얼굴 마사지를 좋아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엄마 얼굴을 꼭꼭 누르고 나긋나긋하게 매만지다 보면 엄마는 코를 골고 주무시곤 했다.


두 분 살갗의 촉감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지금은 투정 부리지 않고 안마도 마사지도 잘하고 내가 지치면 내 딸아이를 부려서라도 해드릴 텐데 두 분 다 이젠 나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모라동 단칸방에서 너무 좁아 더는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왼쪽엔 도축장과 오른쪽은 공장으로 둘러싸여 시커먼 개천이 흐르던 노동자들의 주택 지대였던 삼락동으로 이사 갔다.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이 모여들다 보니 공장 주변인 삼락동의 주거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공장 주변에는 이른바 '날라리 집'이라는 주거공간이 즐비했다. 당시 집주인들은 더 많은 셋방을 놓기 위해 조금이라도 여유 공간이 있으면 방 한 칸에 부엌을 달아 날라리 집을 추가했다. 한 집에 대여섯 개의 셋방이 딸려 있기 일쑤였다. (국제신문 2013. 8. 20. 사상공단 국제상사)


우리가 살던 곳은 큰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주택가가 형성된 곳이었다. 오른쪽 주택가 가운데쯤에 있는 골목 가장 안쪽에 새로 지은 집이 우리가 처음으로 삼락동에 정착한 집이었다. 삼락동 골목 안집 주인은 ‘이근수’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미군 부대에 다녔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다부졌다. 스포츠머리에 까만 얼굴이었던 아저씨는 상아색 미제 승합차를 사람들이 지나는 집 앞 큰길에 주차해서 아저씨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 집 주변에 있던 '백조세탁소', '백천 약국' 그리고 지금은 부산의 맛집이 된 '할매 재첩국집' 앞을 오가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남아있는 삼락동 백조 세탁소
삼락동 할매 재첩국

골목 안집도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위에는 몇 세대가 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1층에는 네 집 정도가 살았던 것 같다. 삼락동 골목 안집에서는 나와 작은오빠는 겨울이면 연탄가스를 마셔 1층 세대가 같이 쓰던 수돗가에 내복 입은 채로 실려 나와 엄마 아버지에게 물세례를 받고 동치미 국물을 마셨다. 내가 수학을 못 한 게 그때 마신 연탄가스 때문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곤 한다.


부산의 사상공단은 도심지에 흩어진 공장을 한데 모으기 위해 1968년 착공되어 1975년 준공된 곳으로, 주로 신발·봉제와 주물·조립 금속 등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자리 잡았다. 공단에는 당시 한국경제의 주력산업이던 신발, 섬유, 화학 공장 등이 즐비했다. 그중 부산을 먹여 살린 신발 산업의 선두주자는 바로 ‘국제상사’였다. (국제신문 2013. 8. 20. 사상공단 국제상사)


국제상사 주변에는 하도급 업체들이 많았는데 엄마는 그중 한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신발공장은 저임금에 고혈을 짜내는 혹독한 노동환경이었다. 엄마도 날마다 잔업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잔업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잔업 하는 날이면 더 술에 취해서 어린 우리더러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캄캄한 밤인데도 밖으로 내몰았다. 지금도 엄마 회사 앞에서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옹기종기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우리 형제들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있는 집보다 차라리 엄마 회사 앞이 맘은 편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부산을 택했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만 부산에서 이방인이 되어 술과 함께 단칸방에 고립되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대체로 과묵했지만 일단 술을 마시면 적절한 말이든 막말이든 다 쏟아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부산이 무서웠던 것 같다. 자신이 설 자리 없는 낯선 부산에서 기댈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비극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본인도, 나머지 가족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엄마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해가 떨어진 뒤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를 데리러 간 자식들과 엄마가 집에 오면 지옥문이 열리게 된다.


두 분의 레퍼토리는 늘 똑같아서 지겨울 정도였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늦게 오냐”하고 시비를 걸면, 엄마는 “잔업을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 그럼 당신이 나가서 돈을 벌어와”하고 아버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 그때부터는 날라리 셋집의 이웃들과 함께 부모님의 부부 싸움을 공유하게 된다. 쌍욕이 난무하고 이성을 잃은 고함이 나뒹굴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이 깨지는 소리는 싸움의 양념이었다.


그즈음부터 엄마는 두통을 끼고 살았다. 집에서는 밤새도록 술 취한 아버지한테 시달리다 출근하면 공장에서는 악취와 먼지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두통은 고질병이 되고 있었다. 엄마는 일하기 위해 ‘뇌신’(엄마는 ‘뇌선’이라는 두통약을 ‘뇌신’이라고 불렀다)이라는 한약처럼 한 첩 한 첩 예쁘게 접힌 가루 두통약과 커피를 달고 살았다.

뇌선 두통약 사진:blog.naver.com/pyhgoodday/220137169682

엄마가 공장에서 불리는 별명이 있었다. 엄마의 업무는 다 만들어진 운동화 안에 하얀 습자지를 구겨 동그랗게 만들어 넣는 일을 해서 동료 아줌마들이 엄마를 ‘종이야, 종이야’라고 불렀다. 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야무지게 했지만, 엄마는 회사 아줌마들과 자주 싸워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가 나면 할 말을 속에 담지 못하고 공격적인 말을 뱉어버리는 호전성과 자신의 잣대에 끊임없이 타인을 판단하는 판사병 때문에 엄마는 늘 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내게도 있는 공격성과 판사병이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당연하지만 거부하고픈 각성이 들면 그것들만 도려내고 싶어진다.


그렇게 ‘종이’ 이정자 엄마는 사상공단에서 졸음과 두통을 뇌선과 커피에 기대어 산업 역군으로, 가장으로 떠밀리고 있었으니, 이런 엄마에게도 볕 들 날은 찾아오고 있었다.





상위 사진:blog.naver.com/gerila1/30083964042 국제상사의 대표 브랜드였던 프로 스펙스


백조세탁소,할매재첩국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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