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에 볕 들 때도 있더라
엄마의 꿈도 2층으로
엄마는 정의의 수호자였다.
엄마 생각에 부조리함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말해야 직성이 풀렸다. 엄마와 같은 부류의 호전적인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참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싸웠다. 목청까지 좋았던 엄마가 어릴 적엔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십 대 후반, 나는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나게 고물 중고차를 몰고 다녔다. 그날은 엄마를 뒷좌석에 모시고 시내에 볼일을 보러 나가는 중이었다. 좌회전 신호를 받고 출발했는데 왼쪽에서 신호 위반한 차가 내 차 운전석 바로 뒷좌석 문을 받아버렸다. 처음 사고를 당하니 순식간에 정신줄을 놔버렸다. 멍하니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상대편 운전자가 나를 보며 “여자가 운전을 똑바로 해야지!”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정신줄에 이어 기 까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다행히 우측 뒷좌석에 앉아 다친 데 없던 엄마가 차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우렁차게 외치며 다가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 여자가? 너는 남자가 되어 갖꼬 운전을 이 따우로 밖에 못하냐아아아아아아!”
차 사고 난 현장에서 상대 운전자에게 ‘여자가~’ 타령이나 하던 찌질한 대머리 아저씨는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그때만큼 엄마가 멋있게 보인 적은 없었다. 잔 다르크도 울고 갈 전의를 불태운 엄마 덕분에 그 운전자는 내게 사과했고 레커차 기사가 나타나 노란불일 때 달린 그 운전자의 과실임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사고는 일단락되었다.
엄마는 평화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둘째 언니가 엄마와 시장에 가서 콩나물 장사 할머니에게 악착같이 몇백 원 깎으려고 할 때 엄마는 그런 언니를 사정없이 나무랐다. 깎을 게 없어서 노인네 돈을 깎냐며 언니는 혼이 났다. 또 내가 회사 생활 하면서 동료들과 안 좋은 일이 있어 엄마에게 털어놓으면 엄마는 명쾌한 해답을 주곤 했는데 그 내용은 거의 내가 손해를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면 신기하게 마음은 편했다.
엄마의 언행이 일치되지 않고 그 기준 또한 모호한 면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엄마에게 정색하며 엄마의 모순을 따지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엄마 말에 대체로 순종했다. 그 이유는 엄마가 먼저 우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종교 수준이어서 흔들림이 없었다. 엄마는 비록 무식했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울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큰 부자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아마도 엄마의 믿음 덕분에 서로 귀히 여기며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삼락동에 살던 그 당시, 이층집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엄마가 더 부러워 한 사람은 바로 주인이었던 ‘이근수’ 아저씨였다. 아저씨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에게 아저씨의 존재는 오르지 못할 나무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주인집 아줌마와 셋방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를 하게 되면서 주인아줌마와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던 중 아줌마는 엄마에게 자신의 집 앞 공터에 또 2층짜리 날라리 집을 짓는다는 고급 정보를 알려주었다. 엄마는 큰오빠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그 이층집에 꼭 가고 싶다 말했다. 그리하여 엄마는 주인집 아줌마에게 우리가 그 집에 살게 해 달라고 몇 날 며칠을 졸랐다. 마침내 얼마 후 주인아줌마는 수많은 세입자를 제치고 새집의 이 층에 우리 가족이 가게 됐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론 엄마와 큰오빠의 사는 낙은 출근길, 퇴근길에 공사 현장을 가는 것이 되었다. 때론 큰오빠는 동생들을 데리고 그 현장에 가서 우리 집이 하나하나 지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나날이 성큼성큼 올라가는 그 이층집을 보면서 엄마는 고된 야간 잔업도, 집에서 놀고 있는 대책 없는 남편의 술주정도 잘 참아졌다.
드디어 우리는 이층집에 들어갔다.
남의 집 셋방살이였지만 엄마는 볕 잘 드는 이층집을 너무도 좋아했다. 게딱지 같던 화순 집, 모라동 집, 삼락동 골목 안집과 비교하면 이층집은 대궐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1층에 다닥다닥 붙은 셋방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다 보면 1층과 2층 중간에 옥외 화장실이 있었고 2층에 오르면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옆에 혜진이 집이 있고, 왼쪽 제일 가장자리 집은 늘 가을이면 커다란 빨간 고무 대야에 고추장을 담그시던 아주머니 집이, 그리고 가운데가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현관문 옆엔 또 좁은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곳은 연탄아궁이가 있던 곳이다. 연탄아궁이가 밖에 설치되어 이층집에 와서는 그 누구도 연탄가스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연탄아궁이 실은 아버지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이었다. 마침내 아버지도 이층집에서 할 일을 찾았다. 연탄아궁이 실 옆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맞은편에 미닫이문으로 된 큰방이 있었다. 우리 집의 상징이었던 벽은 나무를 길고 좁은 폭으로 잘라 평행하게 붙여 니스칠로 마무리한 광택 나는 진갈색이었다. 거기에 엄마는 호랑이가 사납게 으르렁대는 스킬 자수 액자를 걸어두었다. 널찍한 마루를 지나 큰방 왼쪽으로 가면 샤워실이 있었고 그 옆엔 부엌, 작은방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 삼락동 이층 집 <네이버 지도>
이층집에서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바로 부엌이었다. 작은방 크기와 맞먹는 부엌에서 엄마는 난생처음 서서 요리하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싱크대를 갖게 되었다. 부엌의 특이한 점은 장판을 깔아 놓았다는 것과 마루보다 20센티가량 낮았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주 싱크대 수도를 끝까지 잠그지 않아 부엌을 물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20센티 턱을 가까스로 넘기 직전, 마루까지 물이 넘치기 직전에 이 기가 차는 현장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집에 오니 부엌에 플라스틱 그릇들이 쓰레기와 함께 동동 떠 있었다. 부엌이 물바다가 될 때마다 아버지는 물 푸는 것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때다 싶어 엄마한테 잔소리만 퍼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엌 물난리는 엄마가 신발공장에 다니면서 ‘뇌선’ 두통약을 남용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층집 남향 마루는 엄마가 내 머릿니를 잡는데 최고의 장소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집에 가서 머릿니를 잡고 깨끗이 씻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 말을 엄마한테 했더니 화순에선 상상도 못 하는 일인데 부산에 와선 별일이 다 있다며 혀를 찼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던 사상공단의 초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 수는 70명 가까이 돼서 2부제 수업까지 했으니 머릿니의 출현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머릿니를 발견하면 신속히 죽이고 버릴 심산으로 우리 모녀는 신발장 쪽 마루에 걸터앉아 엄마는 조심히 참빗으로 내 머리를 빗겼다. 이윽고 내 머리에서도 이를 발견하자 엄마는 질색했고 그 뒤 내 머리는 짧게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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