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정자 이름 세 글자는 읽을 줄은 알았지만 쓰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
IMF 때 큰오빠의 사업 부도로 은행에 가서 엄마가 직접 서명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은행에서 괜히 움츠리는 엄마 손에 볼펜을 잡게 한 다음 내가 다시 엄마 손을 쥐어 서명란에 엄마 이름을 천천히 썼다. 엄마 손을 쥐고 엄마의 세 글자를 이름을 쓰노라니 엄마의 수치심이 전해졌다. 그때는 부실하게 사업을 해서 엄마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한 큰오빠가 미웠다.
몇 년 후 학습지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한글 학습지를 가져와 엄마에게 한글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엄마는 귀찮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엄마는 공부라는 새로운 일을 하기엔 몸의 병이 깊어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그 노년의 짐스러운 몸과 질병을 이겨 낼 만큼 ‘한글 공부’는 매력적이지 못한 것 같다. 엄마는 평생 악착같이 돈만 벌어 봤지, 모르는 것을 공부하는 경험은 없었고, 그것은 사치였다. 그런 엄마에게 오늘은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엄마, 이정자 씨!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한테 편지를 써보네.
엄마, 나랑 한글 공부 좀 하지 그랬어? 왜 안 한 거야? 막내가 엄마 안 봐주고 무섭게 가르칠까 봐 겁먹은 거야? 나는 엄마랑 편지도 주고받고 싶었고, 스마트폰도 사서 카톡도 보내고 싶은데 너무 늦었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뒤늦게 정신 차리고 써나가는 이 글들을 엄마는 다 읽었으리라 생각해. 하느님 곁으로 갔으니까 엄마를 어여삐 여기신 하느님이 글 읽는 초능력 하나쯤은 주셨을 테니까. 그곳에서는 아버지랑 싸우지 말고 엄마에 대한 글 잘 읽고 있어. 그리운 우리 엄마! 또 편지할게!
형제 중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큰언니였다. 엄마 아버지가 가장 젊고 부모 노릇이 미숙할 때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살림을 부모님과 제일 먼저 분담해야 했던 언니는 입 하나 덜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털보 할아버지 집에 식모로 보내져서 살았고, 언니가 좀 커서는 부산으로 나가 돈을 벌기 시작해서 큰언니는 엄마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
어느 해 여름, 엄마가 잠깐 언니, 오빠가 살던 부산 자취방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큰언니는 사귀고 있는 남자를 엄마한테 인사시켰다. 엄마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사 온 수박을 마당에다 패대기치고 싶었다. 키는 작고 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몸에 눈빛은 사납고 목에선 쇳소리가 났던 그 남자가 엄마는 몹시도 싫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간 뒤 엄마는 큰언니에게 헤어지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놈의 정 때문에 언니는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그 남자는 나의 큰형부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큰언니 부부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방직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둘째 언니는 하루가 멀다고 멍든 얼굴로 출근하는 큰 언니를 보며 속이 터졌다. 아마도 엄마는 수박을 사 들고 온 형부를 처음 만난 날 당신과 닮은 큰언니의 결혼 생활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삼락동 골목 안집으로 이사하였을 때 큰언니는 첫째 딸을 낳고 형부 고향인 영양으로 잠시 내려갔다. 집주인이었던 이근수 아저씨네 새 날라리 집에 큰언니네가 고향에서 올라와 1층 대문 앞방에 이사 오고, 우리는 2층에 살 게 되었다.
엄마의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았던 큰형부는 그래도 딱 한 군데 쓸모가 있었다. 바로 그것은 우리 엄마 아버지 부부 싸움의 중재자 역할이었다. 큰오빠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모님의 부부 싸움에 진저리가 났을 뿐 아니라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다크호스 큰형부는 여전히 서슬 퍼런 장인 장모의 부부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2층으로 올라와 술 취한 장인을 진정시키고 모두가 듣기 싫어하는 장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흑기사가 되어 주자 엄마도 큰오빠도 큰 형부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바로 ‘남자 닭띠’였다. 엄마는 남자 닭띠는 똥에도 못 쓴다고 악담을 하곤 했는데 바로 우리 아버지와 큰형부가 공교롭게도 닭띠였다. 그러나 엄마의 남자 닭띠에 대한 혐오와는 상관없이 두 닭띠 남자들의 동맹과 결속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울을 보듯 아버지와 큰 형부의 행동 패턴은 닮아 있었고 세상 그 누구보다 두 사람은 서로를 공감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처가에서 자신의 활약으로 큰형부의 존재는 빛이 났고 아버지도 처자식의 외면 속에서 큰 사위를 술친구로, 대화의 상대로 귀히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에서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삼락동 이층집에서 적응해 갈 때 즈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골목에서 소란이 일어나 나가보니 웬 파마를 한, 머리 큰 총각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파마는 충격적 이게도 자연 곱슬머리이었다) “oo아! oo아! 보고 싶다! 네가 안 나오면 나는 안 갈란다!” 하며 넓은 골목길 한복판에서 소리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남자는 맨정신인지 술에 취했는지 우리 집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우리 둘째 언니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둘째 언니는 그 곱슬머리 총각을 방직 공장에서 만났다. 큰언니는 아버지의 성격과 서구적인 외모를 닮아 ‘캐서린 제타존스’와 비슷하다면 둘째 언니는 엄마의 성격과 외모를 닮아 아담한 체구의 ‘선우은숙’을 떠올렸다. 따라다니는 남자도 많았고 회사 동료들도 그 총각은 안된다고 말렸건만 둘째 언니는 스무 살에 일곱 살이나 연상인 곱슬머리 총각과 사랑에 빠졌다.
둘째 언니는 마침내 곱슬머리 총각과 결혼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직도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자식을 결혼시킨다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째 언니는 시집갈 때 아무것도 엄마한테 바랄 수 없었지만, 시누이들의 구박에 언니는 엄마한테 시아버지 이불을 해 주면 언니가 나중에 돈을 주겠다는 제안 했다. 그에 엄마는 이불을 사서 보내고 나중에 언니가 엄마한테 돈을 주자 그 돈을 받았다. 둘째 언니는 엄마가 진짜로 그 돈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 당시 언니는 엄마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서운해했다. 하지만 언니는 며칠 전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엄마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그 돈을 받았을까?” 하며 울었다.
그러나 몇 년 뒤 엄마는 신발공장에서 1년 만근을 하고 회사에서 18K 반 돈 반지를 받게 되었다. 엄마는 그 반지를 둘째 언니한테 주었고 언니는 그 반지를 늘 끼고 다녔다. 어느 날 새벽 둘째 형부가 술에 취해 택시비도 없이 장거리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그러나 언니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택시 기사는 그 새벽에 동네가 떠나가라 욕을 하기 시작했고 둘째 언니는 남부끄러워 엄마가 준 금반지를 택시 기사에서 얼른 빼주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그 반지를 찾기 위해 택시 회사를 찾았지만, 그 기사는 회사를 그만둔 뒤였다.
퉁퉁한 체격에 호남형의 둘째 형부는 우리 형제들에겐 다정했다. 주말이면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해서 또 귀여운 조카 미라를 보기 위해서 약속이라도 한 듯 둘째 언니네로 바글바글 모였던 우리 형제들에게 둘째 형부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특히 셋째 언니에게 각별했던 형부는 한창 멋 부릴 나이였던 처제를 시내로 데리고 가서 우리 형편으로는 살 엄두도 못 내던 나이키 운동화를 사주었다. 새 운동화를 너무도 아꼈던 깔끔이 셋째 언니는 며칠 뒤 깨끗이 빨아서 옥상에 널어두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가보니 운동화는 누가 홀라당 집어가 버리고 없었다. 셋째 언니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둘째 형부는 세상 모든 이에게 친절했지만 딱 한 사람, 자신의 아내에게만은 매정하고 이기적이었다. 부부간의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언니가 첫 아이를 가져서부터였다. 어느 날 밤, 둘째 언니는 여자 문제로 형부와 심하게 다투고 친정으로 울며 왔다. 그러나 엄마는 그 야심한 밤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는 이유로 언니를 혼내고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엄마의 종교는 자식이었고 엄마에겐 그 자식을 버리는 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후로는 둘째 언니네가 여자 문제로 싸우면 아예 엄마가 오빠들을 앞세워 언니 집으로 갔다.
둘째 언니를 너무도 사랑해서 부끄러움도 잊은 채 무릎이 닳도록 언니 이름을 부르던 둘째 형부는 결혼 생활 내내 조강지처라는 파랑새를 두고 파랑새는 세상의 다른 여자에게 있을 줄 알고 찾아 헤매다 남매와 언니를 두고 50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리학에서 ‘귀향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남녀가 서로를 낯설게 여기지 않으면, 즉 상대에게서 자신의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면 편안해지고 끌리는 것이 사랑의 일반적 법칙이다. 우리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외형적인 모습에만 끌리지 않고 그 사람의 능력, 외모, 성격, 학벌, 집안 배경, 종교 등 여러 가지를 판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경험한 내 가족의 모습을 ‘재현’ 해 줄 사람에게 강하게 끌린다. (가족의 두 얼굴, 최광현, p.78)
언니들은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을 지나 자신을 탐색할 사춘기 반항의 시간도 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고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는 지옥 같은 집을 탈출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언니들을 기다린 것은 언니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재현해 줄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를 만나 엄마처럼 고통스럽게 짊어져야 할 결혼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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