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아직도 친구와 싸우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부모의 품에서 서서히 벗어나 친구들을 향해 가는 사춘기 소녀의 폭발하는 감정을 잘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라일리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가족 섬에서 친구들의 우정 섬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집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을 만큼 내 '감정의 본부'는 보호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족 섬이 튼튼해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나의 우정 섬의 규모는 더 커지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서 운명의 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들과는 풍물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군대 가고 없는 남자 동기들의 빈자리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리 셋은 동아리를 척척 이끌어 갔고 의리도 남다른 것이 어느 누구도 남자에게 한 눈 팔지 않고 우리의 열정을 오로지 동아리를 위해 쏟아부었다. 그들을 만난 뒤 나의 우정 섬은 내 인생 어느 때보다 견고해졌고 그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며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세 명의 우정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거의 매일 만나 자신에게 드리워진 짐을 술과 수다로 푸느라 갈지(之) 자로 걸으며 귀가하고 다음 날 숙취로 자신을 혐오하는 일상은 우리 우정의 훈장과도 같았다. 시간은 흘러 여자 동기들은 나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모두 기혼자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으로 우린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만난다 하더라도 변화하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따라잡기엔 우리는 너무도 멀리 있었다. 어쩌다 한 번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감정의 체증이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40대가 되면서 1년에 한 번은 만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친구들을 만나면 '억지 공감'을 해야 했고 또 그것을 되돌려 받았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역할로 빛나고 있는 중년의 친구들을 20대의 추억의 사진 한 장안에 가두고 있었다.
재작년 말 우리는 30대부터 모은 곗돈이 너무 많아져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지 선정부터 우린 많이 삐걱댔다. 게다가 누구도 여행의 계획을 세우려 들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출국 날짜가 임박하자 다행히 제일 걱정 많은 친구 하나가 나머지 친구들의 성의 없는 지지 속에 계획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우리는 재작년 1월에 3박 4일 일정으로 대만 여행을 떠났다. 친구들에겐 설렌다고 말했지만 과연 이 여행을 가는 게 맞는지 불안은 날마다 커지고 있었다.
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둘째 날 밤에 술을 마시다 일이 일어났다. 두 친구가 낮에 내 행동이 맘에 안 들었는지 대뜸 내게 물었다.
"OO아 니는 거기서 그리 사나?"
한 친구가 나한테 이렇게 물으니 또 한 친구가 맞장구쳤다.
"그래, 니는 그리 사나?"
내가 멍하게 있으니 다른 친구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때는 남은 일정도 있고 해서 너그러운 척하며 투어를 마무리한 뒤 귀국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온 뒤 전혀 너그러울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내 정체성의 뿌리를 잡고 뒤흔들었기 때문에 날마다 분노로 몸서리쳤다. 그래서 단톡 방에 계에 대한 건의를 했다. 그러나 내 속마음을 알 길 없는 다른 친구들에겐 나는 우정의 상징인 계를 깨고자 하는 대역 죄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또 싸움으로 번져 나는 계를 탈퇴하고 우리의 우정은 2년 동안 휴면 상태다.
그 후 1년 동안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에 대한 미움으로 '너희들 없이도 난 잘 살 거고 잊으면 그만이다'라는 다짐까지 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두 친구가 꿈에 계속 나오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는 술만 먹으면 그 친구들이 너무도 보고 싶어 졌다. 얼마 후 무의식이 두 친구의 우정이 필요하다고 내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친구에게 술기운을 빌어 카톡을 보냈다. 답장은 그냥 잊고 살라는 냉정한 문장들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들도 내가 준 상처에 힘들었을 것이고 아직도 진행 중일 테니까.
이제 나는 친구들 없인 완전한 '나'일 수 없음을 안다. 우리의 우정의 유효기간은 벌써 지나버렸고 그들 없이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20대, 30대의 행복의 근간이 되어 준 우리의 우정 섬의 유효기간은 과거와 40대인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잃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친구들이 두렵고 어떻게 화해의 방법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언젠간 친구들을 되찾기 위해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커피 한 잔과 부산행 KTX 기차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