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 온 뒤 우리 집은 모라동에서 2년 동안 단칸방에서 셋방을 살다 옆 동네인 삼락동으로 방 2개짜리 2층 집으로 이사를 갔다. 삼락동은 이름과는 다르게 아름답지 않은 공장들과 도살장 그리고 악취를 풍기는 시커먼 개천이 흐르던 곳이었다. 2층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곳의 좁다란 골목들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우리 집은 삼락동에서도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집은 건너편 2층 집이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큰 키에 늘 군인 같은 짧은 머리를 하고 흰색 미제 승합 차를 몰고 다녔다. 주인집에는 삼 남매가 있었는데 막내아들이 나보다 몇 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부잣집이었으니 당연히 그 집엔 책이 많았다. 하지만 주인집 막내 오빠는 책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주인집에 드나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막내 오빠의 전시용 책들을 자주 빌려다 읽은 것은 기억한다. 그중 하나가 <빨강 머리 앤>이다.
그 책을 빌렸을 때는 겨울이었다. 지금도 빨간 홑청의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부엌 옆 햇살 쏟아지는 작은방에서 <빨간 머리 앤>을 읽고 있는 내가 보인다. 12살의 내가 본 앤은 참 신기한 아이였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신의 ‘상상력’으로 현실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나도 앤처럼 ‘상상력’을 기가 막힌 나의 현실에 적용해 보았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도 술을 마셨고, 기분이 나빠도 술을 찾았다. 그다음은 엄마와의 혈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도 한 성질 하시는 분이라 그런 아버지를 순순히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살림살이까지 쓸어 엎는 엄마와의 혈투 끝에 지쳐 쓰러져 주무시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절대로 얌전히 자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못 자게 하려고 밤새 소리를 지르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우리가 다 나가버리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서 아버지의 고정 레퍼토리는 ‘내 인생은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이렇게 됐다’였다. 엄마와 우리 형제는 아버지가 병들어 누워계실 때까지 매일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
앤의 ‘상상력’은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한 아버지가 마루에서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엄마와 싸워도 괴로운 현실을 피해서 앤이 사는 캐나다(그때는 앤이 미국 사람인 줄 알았다)로 날아갈 수 있었고 앤과 만나 즐거운 산책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앤은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앤 덕분에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 때문에 병들어가는 엄마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언니 오빠들도 잠시 잊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현실 도피용 상상 놀이는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6학년 여름, 우리는 학장동으로 이사를 갔다. 드디어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삼정 송림 맨션. 우리 아파트 이름이다. ‘맨션’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먼 우리 아파트는 산등성이를 따라 지어진 5층 건물에 네 동짜리 소형 아파트인데 멀리서 보면 산을 기어가는 지네 같았다. 우리 가족은 살던 집을 빨리 비워야 해서 외부 공사도 마치지 않았던 어수선한 새 아파트에 꾸역꾸역 이사를 가야 했다. 아직 공사 중인 아파트인데 우리처럼 이사 온 집들이 꽤 있었다. 오후에 놀이터를 가보니 내 또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동에 사는 선경이와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전학 후 따돌림, 텃새로 힘들었던 학교생활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낯선 환경에서의 힘든 생활을 언니나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의 무게에 허리가 휘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 고민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한 것 같다. 나는 학교생활뿐 아니라 방과 후 시간까지도 선경이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땅 꺼미가 지고 술에 취한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선경이 집으로 피난을 갔다. 선경이 집은 전쟁터였던 우리 집을 피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안전 기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우리는 지긋지긋한 학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장 여중을 거쳐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진학하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IMF 외환위기 그즈음에 우리 집은 또 이사를 가게 된다. 이사 가기 전엔 선경이와 가끔 만나기도 했는데 이사한 후론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선경이를 거의 잊고 있었다. 그날도 회사에 출근하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회사로 대학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길모야! 니 이선경이란 친구 아나? 이 애가 니 찾는단다!"
"니가 우예 아노?"
"이 애가 벼룩시장에 니 찾는다고 광고를 냈다! 하하 하하!"
나와 연락이 끊긴 후 선경이가 벼룩시장에 나를 찾는다고 광고를 낸 것이었다. 나는 평소 벼룩시장을 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대학 친구는 하루 일과를 벼룩시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선경이가 애타게 나를 찾던 벼룩시장 신문을 오려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중년의 아줌마로 똑같이 외동딸 하나씩 키우는 우리는 가끔씩 전화로 수다를 떨며 멀어졌던 마음의 거리를 좁히곤 한다.
우리 아파트 옆엔 크린랩 공장이 있었고 그 옆엔 금성 사료 공장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는 사료 트럭이 휩쓸고 간 뒤 날리는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학교를 가야 했다. 사료공장을 지나 왼쪽으로 걷다 보면 청파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다. 그렇게 급경사의 학교 진입로가 시작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정남 아파트를 지나 왼쪽으로 돌면 교문이 나온다. 우리 학교 운동장은 정남 아파트에서 가장 높은, 맨 뒤에 있는 동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체육시간에 공이 자주 정남 아파트로 날아가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왕따의 기억을 지우며 중학교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정계연 선생님이었다. 26살의 글씨체가 예쁘신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키가 크시고 호리호리하시며 늘 가슴을 쫙 펴고 바삐 걸으셨다. 말씀이 아주 빨랐던 선생님은 독특한 웃음소리를 갖고 계셨다. 높은 목소리 톤에 약간 허스키하셨던 선생님이 호호호 웃으시면 공기가 쨍하고 갈라지는 게 눈에 보일 것만 같았다.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입꼬리가 올라간 하얀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그걸 보면 우리 선생님은 주무실 때만 빼고 거의 웃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다.
정계연 선생님의 우리 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은 그 뒤 어떤 담임선생님에게서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다. 우리 반도 선생님께 언제나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월말고사를 봐서 점수가 가장 많이 오른 반을 시상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우리 반은 늘 1등이었다. 또 교실 뒤 게시판을 꾸미는 환경미화 시상도, 합창대회도 우리 반이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엔 질투쟁이 선생님과 학생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선생님은 학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의 정서적인 부분도 살뜰히 살피셨다. 학기 초엔 반항적이고 노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들마저 선생님은 반 중심으로 이끄셨고 그 아이들이 잊지 못할 중학교 2학년 생활을 해내게 하셨다. 특히 선생님은 내가 취미로 쓰고 있던 시들을 보시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앞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쓸 것을 격려해주셨다. 그해 선생님의 정서적 지지 덕분에 나는 학업, 춤, 운동 등 다방면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지하 멘틀에 머무르던 자존감을 세상에 환히 드러낼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새 학기가 되면 선생님들은 가정방문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집에 있단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워 친구도 집에 초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집에 선생님이 오셔야 한다는 사실에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이윽고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오래된 찻잔 세트를 꺼내 정성껏 커피를 타서 선생님께 대접했다. 너무도 어색했지만 한편으론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시고 선생님을 다음 친구 집까지 모시고 가야 했다. 구덕터널 근처까지 선생님을 모시고 갔는데 꽤 오랜 시간 걸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대학교 생활, 선생님의 종교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날 제법 드센 꽃샘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혀서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보이던 산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철부지 15살 우리는 선생님과 헤어짐이 오는 줄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른 채 학기 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선생님께 시집을 선물로 드렸고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엽서를 써주셨는데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내용이 쓰인 엽서였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엽서를 읽은 다음, 1번부터 마지막 번호 친구까지 앞에 나와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끝까지 낭독했다.
호수는 가까이 있을 땐 그 푸르름을 알지 못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 호수의 푸름을 그제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겐 정계연 선생님의 사랑이 호수와 같아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이 되는 과정 속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러던 20대의 어느 날 부산시 교육청에서 ‘스승 찾기’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다. 나는 바로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정계연 선생님이 어느 학교에 재직 중이신지 알아내서 그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정계연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00년도에 담임 선생님이셨던 학장 여중 김길모예요! 기억나세요?”
하고 두근거리며 여쭤보았다.
“길모…….? 어, 그래! 기억난다! 얼굴 넙데데한 길모! 알지! 알지!”
그렇게 다시 만난 선생님과의 인연은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민간 선교활동으로 몽골에 가신 자랑스러운 선생님. 그곳에서도 선생님은 사랑을 실천하고 계시고 제자의 행복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
자신의 무능력함에서 오는 무력감과 외로움을 술로 잊고자 했던 아버지. 날마다 자식들과 아내를 상대로 비열한 괴롭힘이 끊이지 않았던 그때를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치지 않고 살았다는 것만으로, 그 흔한 가출이나 비행 한번 저지르지 않고 살아냈다는 것만으로 어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고통을 이겨내고 어른이 되어 이렇게 회고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신께서 내게 주신 세 명의 수호천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바로 그 수호천사는 빨강 머리 앤, 선경이 그리고 정계연 선생님이다. 창으로 햇살 가득 쏟아지던 좁은 방에서 앤을 만나던 그날, 선경이와 잠옷 바람으로 해 질 녘 삼정 송림 맨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그날, 정계연 선생님과 처음으로 교무실에서 상담하던 학장 여중 2학년 때 3월의 어느 날, 그날들 이후로 나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 큰 사랑으로 향하는 길 앞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제는 그 한없는 사랑 안에 있음에 감사하다.